봄의 감각|조아영<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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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주 섬에선 벌써 꽃 소식이 들린다. 동백꽃이 소담스레 피어오르고 양지바른 들 담은 개나리꽃으로 노랗게 수 놓여져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먼 곳도 아니지만, 그러나 서울의 바람은 아직도 차다. 제주 섬으로부터의 꽃 소식에 봄이 왔다는 안도감으로 겨울동안 한껏 웅크려 있던 가슴을 일시에 활짝 펴기엔 아직 서울의 하늬바람이 너무 차가운 것이다. 한강 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전철 역두에 서 있노라면 북녘의 어느 덮인 산정수리, 혹은 응달진 깊은 계곡에서 막 바로 내리치는 듯한 매섭도록 차가운 바람에 문득 온몸을 떨며 코트 깃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아직 추위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 쌀쌀한 바람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바람까지 더욱 써늘하게 하는 것이다. 지난달엔 국민투표니 학생석방이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큰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계절감각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러한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나서도 본능을 향한 의식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봄은 눈앞에 와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아직 영하의 차가운 겨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시대상황 흑은 시대분위기가 계절까지 조작하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이러한 조작된 겨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영상의 포근한 날씨가 되겠습니다』따위의 일기 예보나 꽃샘바람 같은 이제는 잊혀진 어휘까지 생각해 내어 날카로운 바람으로부터 견뎌 내려고 애써 본다.
조작된 계절 감각은 봄의 미각까지도 조작되기를 강요한다. 여느 땐 파릇파릇한 봄 미나리가 첫선을 보이면 우선 시각으로 봄이 가까이 와 있음을 느끼고 미나리 강회니 냉이 달래의 초 무침의 향기로우 미각에서 싱그러운 봄 기분에 젖곤 했는데 요즘엔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오이니 토마토 풋고추 시금치 따위가 한 겨울에도 시장에 쌓여 있어 미각으로 봄을 느끼는 일도 어렵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 봄은 산천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바람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도 틀림없이 찾아들 것이다. 제주 섬으로부터의 꽃 소식에도 우리의 마음이 아직 겨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완벽한 봄을 맞기 위한 진통으로 생각해도 좋다. 영국의 여류시인 캐더린·맨스필드도 이른봄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양이 황금빛 손가락으로 나무줄기를 어루만지며 별거 벗은 나무 가지 위에서 노란 곱슬머리를 흔들고/바람은 들에서 홀로 춤추며 작렬하는 웃음소리를 터뜨려도/잠에서 깬 수목들은 몸을 움츠리고 숲은 흐느낌에 가득 찼으며/아직 푸른 호수는 덜덜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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