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돈봉투 대신 책값만 … '투명' 출판기념회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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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전주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서 김승수 전 전북 정무부지사가 ‘투명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후원금 모금 창구로 변질된 출판기념회 관행을 깨기 위해 액수 확인이 되지 않는 돈 봉투는 사절했다. 한 참석자가 투명한 박스에 책값 2만원을 넣고 있다. [전주=하선영 기자]
하선영
정치국제부문 기자

25일 오후 전주의 전북대 삼성문화회관에선 김승수(45) 전 전북 정무부지사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김 전 부지사는 『두근두근 전주 36.5도』란 책을 내고 전주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이날 행사장에선 진풍경이 펼쳐졌다. 김 전 부지사 측이 “책값 2만원만 받겠다”며 행사장 곳곳에 안이 훤히 보이는 투명 아크릴 박스 10여 개를 비치했다. 통상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에선 ‘흰 봉투’를 받는다. 봉투 속에 얼마가 담겼는지는 내는 쪽과 받는 쪽만이 안다. 그래서 출판기념회가 사실상의 후원금 모금 창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불투명 봉투’ 관행을 깨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두툼한 ‘봉투’를 준비한 참석자들과 행사 진행자들은 곳곳에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몇몇 참석자는 ‘△△건설’ ‘○○산업’ 등이 적힌 봉투를 꺼내놓기도 했다.

 ▶진행자=“흰 봉투는 안 받습니다.”

 ▶참석자=“대신 내달라고 부탁받은 건데 안 되나요?”

 ▶진행자=“곤란합니다. 5만원권은 안 되고요. 1만원짜리 두 장만 넣어주세요.”

 한 참석자는 겸연쩍어하며 준비해온 흰 봉투에서 1만원짜리 2장을 꺼내 투명함에 넣었다. 5만원권 등 고액권을 갖고온 사람들을 위해 행사장 구석에 환전 코너도 설치됐다.

 출판기념회는 이렇게 혼선을 빚기도 했지만 참신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최용철(40)씨는 “책값만 낸다고 하니 일반 시민들도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지 않겠느냐. 투명한 출판기념회가 많이 확산됐으면 좋겠다”며 신기해했다. 주부 이성자(59)씨도 “출판기념회는 당연히 공개적으로 책값만 받는 게 정상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투명 출판기념회’를 연 데 대해 김 전 부지사는 ‘출판기념회 수익=깜깜이 후원금’이라는 의혹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늘 책 판매 수익과 대관료 등 행사 비용은 투명하게 모두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는 ‘특권 내려놓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출판기념회가 사실상 정치 후원금 수금 행사라는 비판이 일자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법안 개정 방침을 밝혔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출판기념회에선 책을 정가 판매하고 수입·지출을 중앙선관위에 신고하는 ‘국회의원 윤리실천법안’을 24일 발의했다.

 하지만 법안을 고치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 있다. 김 전 부지사처럼 투명 출판기념회를 열면 된다. 이날 행사가 작지만 의미 있었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다. 앞서 민주당 박지원 의원도 “당이 법안까지 낸 만큼 솔선수범 차원에서 다음 달 4일 예정된 출판기념회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광주시장 선거에 뛰어든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다음 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온라인으로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특권 내려놓기’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 ‘작은 실천’을 보여주는 게 진짜 개혁이다. 또 구태정치의 산물인 출판기념회도 그만할 때가 됐다.

하선영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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