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교양] '스크린 위의 삶'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스크린 위의 삶/셰리 터클 지음, 최유식 옮김/민음사, 1만5천원

제목(원제 Life on the Screen)만 보면 얼핏 영화에 관한 책으로 오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스크린은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킨다.

지난 세기의 인간이 은막(銀幕)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갑갑한 현실에 대한 위안을 얻고 잠시나마 도피를 꿈꿨다면, '영화의 세기'가 점점 지고 있는 이때 '모니터'가 '스크린'을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모티터와 스크린의 차이는 엄청나다. 영화을 볼 때 우리는 단지 수동적인 존재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 우리는 드라마의 창조자가 된다.

이 가상 공간에서는 컴퓨터 사용자 자신이 감독이고 주연배우고 나아가 관객이기도 하다. 은막과 비교하면 저택의 다락방 같은 이 좁은 모니터 위에서 현대인들은 타인과 소통할 뿐 아니라(채팅) 밤새워 게임을 즐기기도 하고 심지어 성적인 욕망을 분출하기도 한다.

멀쩡한 사람이 게임에 중독돼 현실감을 잃어 버렸네, 채팅으로 가정이 파괴됐네 등등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문화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진짜 삶보다 더 실감나는 현실'이 됐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과학사회학 교수인 저자는 사이버 문화가 인간의 존재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갈지를 탐색한다.

사이버 섹스, 사이버 결혼 등 가상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에 놓인 장벽이 급격히 허물어지는 시대에 기존의 '인간'과 앞으로의 '인간'은 어떻게 다를지를 예견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낙관론적 입장에 서 있다. 인류는 시뮬레이션 세계로부터 혼돈을 겪는 것이 아니라 되레 자아.사회.현실을 비추는 모델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

나아가 그는 인간이란 DNA에 프로그래밍돼 있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닐지, 라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무튼 새로운 인간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 시대를 대처하기 힘들다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8년 전인 1995년에 나온 관계로 그동안의 비약적인 인터넷 문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사이버 문명의 기본 전제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