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납북 선원 2명도 상봉 … 민감한 북 "2분 이상 취재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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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이산상봉에선 납북자 상봉도 이뤄졌다. 6·25전쟁 중 납북된 3명, 전후 북으로 끌려간 납북 선원 2명이 남쪽의 가족들을 만났다. 박양곤(52)씨는 1972년 12월 28일 서해에서 홍어잡이 도중 납북됐던 오대양호에 탑승했던 형 박양수(58)씨를 42년 만에 만났다. 양수씨는 16살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배에 올랐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사이 10살이었던 동생이 쉰 살이 넘었다. 양곤씨가 “행님아”라고 부르자 두 사람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부둥켜안은 거제도 두 섬 소년의 얼굴은 세월을 넘어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남쪽의 17세 조카 종원(17)군의 얼굴을 거친 손으로 쓰다듬던 양수씨는 부모님과 큰형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감격에 벅찼지만 형과 동생 사이엔 체제의 벽도 있었다. 양수씨는 북에서 받은 훈장을 상봉장에 가져와 동생에게 보여줬다.

 최선득(71)씨는 1974년 백령도 인근에서 수원33호에 승선했다 납북된 동생 최영철(61)씨와 40년 만에 만났다. 당시 21살 영철씨는 북측의 함포 사격을 받고 수원32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울기만 했다. 선득씨는 남쪽의 형제 영득(72)씨와 자신의 아들 용성(43)씨가 쓴 편지를 영철씨 손에 쥐여줬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도 60년 만에 “오빠, 형, 동생”을 외쳤다. 한국전쟁 당시 경기도 화성에서 인민군에 잡혀 의용군으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최병관(68)씨는 처음 보는 동생들(최병덕·47, 최경희·53·여)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최씨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북에 살아 계셨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동생이 가져온 아버지와 배다른 7남매의 사진을 보고 “그래도 이렇게 사셨으니 외로움이 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전시 납북자 최종석(93)씨의 딸 최남순(65)씨는 기대 속에 이복동생들을 만났지만 가족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3살 때 한국전쟁으로 아버지와 헤어졌던 최씨는 이복동생이 가져온 빛 바랜 아버지의 사진을 한참 보고는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출신지, 직업 등을 맞춰보던 최씨는 “친남매였으면 좋았을 텐데 인연이 아니라 섭섭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북한은 납북자 가족의 상봉에 민감했다. 북측 안내원은 남한 취재진이 납북자 가족에게 몰리자 “테이블에 2분 이상 있지 말라”고 해 취재진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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