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좋아하는 아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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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춥고 쓸쓸한 겨울이다. 이제 한해가 가려고 어둠은 어느 때보다 일찍 찾아온다. 모든 거리는 이 일찍 찾아오는 빈객을 맞기 위하여 대낮부터 깊이 머리를 숙이고 있고 아마도 이런 상대는 당분간 이 땅의 모든 거리에서 계속되어야 하리라.
그리하여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깊은 복종의 법을 배우게 하고 그렇게 해서 겨울은 오히려 친근하게 되어가리라. 마치 노예들에게 부자유가 더욱 다정하게 느껴지듯이 봄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겨울에 익숙해지리라. 봄은 다만 그것이 올 때까지 환상으로써 잠시잠시 기억될 뿐일 것이다.
나의 아이는 조금 있으면 세 살이 되는데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희망과 함께 깊은 불안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의 존재가 유난히 허약하고 저물녘 풀잎처럼 가냘프게 의식되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불안과 가냘픔의 의식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겨울이 만들고 있는 모든 살벌함, 강요, 그런 것에 깊이 연유하고 있고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의 존재를 확인해보곤 하지만 그 때마다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지고 저녁은 빨리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가 환상의 재주가 많은 것이 더욱 불안하고 슬프다.
나의 아이는 언제부턴가 자기가 꾸며내는 환상들에 깃들여 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자기가 그렇게 터득한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나의 아이는 무엇이 가지고싶을 때, 거짓으로 그것을 가지는 흉내를 내는데 천재적이다. 「바나나」가 먹고 싶을 때는 「바나나」를 그려놓고 집어먹는 시늉을 함으로써 충분히 포만스러워지는 모양이다. 비단 그런 것뿐이 아니라 모든 물건과 장소가 그 아이에겐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해 버린다.
물론 아이들이란 누구나 이런 환상의 시기를 한 때 거치는 법인지도 모른다. 아마 어떤 시기가 지나면 아이는 이런 환상으로써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환상이란 결국 깨어지는 운명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별을 만들고 봄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결국 현실이 불충분하다는 증명밖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참하게 깨어질 때를 우리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거대한 환상일수록 끝은 더욱 슬프게 변모하는 것이다. 엄청난 환상들, 말하자면 지금은 그 환상들이 깨어지고 있는 겨울인 것이다.
아이와 환상놀이나 하면서 나는 이 겨울을 보내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지나치게 잘 적응해버리는 능력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아이만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같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기가 바라는 물건이 손에 쥐어지지 않을 때는 떼를 쓰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 했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자라는 모든 아이들만은 그렇게 성가시고 두렵게 자라기를 바란다. 그러면 겨울도 그 투쟁의 열기들로 따사로와지리라. 그러나 이 정적의 겨울, 그런 희망은 얼마나 어리석고 불가능한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누군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나의 우정을 보낸다. <강은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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