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어디로 똥을 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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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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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 중국에 황대구(黃大口)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입이 너무 커서 별명이 ‘대구(大口)’였습니다. 하루는 그가 삼평(三平)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사가 물었습니다. “입이 크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대체 입이 얼마나 크기에 그렇게 불립니까?” 우쭐해진 대구 스님이 말했습니다. “하하하, 온몸이 다 입이라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삼평 선사가 한마디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똥은 대체 어디로 눕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황대구 스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언뜻 들으면 ‘빅 마우스’ 스님의 허풍을 꼬집은 유머입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유머가 아니라 법문입니다. 사실 저도 ‘큰 입(大口)’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많이 먹고, 많이 붙들고, 많이 삼키려 합니다. 몸에 좋다고 할수록 더합니다. “화학 조미료가 없다더라” “자연산이라더라” “국내산이라는데”. 다들 잘 먹는 일을 최고로 칩니다. 거기에 건강한 삶이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런 우리를 향해 삼평 선사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말합니다. ‘잘 먹는 것’만 보지 말고 ‘잘 싸는 것’도 보라고 합니다.

 #풍경2 : 그리스도교인들은 종종 “하느님(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축구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에도,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장에서 건네는 수상 소감에서도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멘트를 던집니다. 거부감을 느끼는 이도 있습니다. “모든 걸 저렇게 종교적으로 해석해야 하나. 해도 너무 한다”는 반응입니다. 당사자들은 대개 “내가 잘되는 건 하느님의 은혜다. 그러니 감사를 드려야지”라는 생각입니다. 감사의 방식이 때로는 너무 적극적이라 공격적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현문우답’은 궁금합니다. 그럼 하느님은 우리 팀만 돕는 걸까요. 만약 상대팀에 나보다 더 독실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한 그리스도교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그가 패한 것은 하느님의 뜻인가요. 그럼 우리는 왜 이겼을 때만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까요. 패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승리의 하느님’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 ‘패배의 하느님’은 굳이 외면하면서 말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린다.” ‘현문우답’은 이 구절을 묵상합니다. 여기에는 훨씬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건 그리스도교식 배설법입니다. 결승골의 영광, 수상의 영광을 자꾸 자신에게 돌리면 어떻게 될까요. 내 입이 점점 커집니다. 욕망이 커지고, 뿌듯함이 커지고, 자존심도 세져서 결국 거대한 입을 가진 ‘대구’가 되고 맙니다. 나중에는 온몸이 입이 될지도 모르죠. 밥 들어가는 입구만 있고 똥 나오는 출구는 없는 ‘대구’ 말입니다.

 따져봅니다. 밥 먹는 식탁과 볼일 보는 화장실, 어디가 더 중요할까요. 맞습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숨 쉴 때도 그렇습니다. 들숨만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나중에는 풍선처럼 부풀고 부풀어서 ‘빵!’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삼평 선사가 꼬집었습니다. “그럼 똥은 어디로 누는가?” 날숨은 언제 내쉬느냐고 말입니다.

 얼마 전 100주년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지난해 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입니다. 암이란 진단을 처음 전한 이에게 이 목사가 꺼낸 첫 마디는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현문우답’은 거기서 배설의 지혜를 봅니다. 영광만 돌리는 게 아니더군요. 기쁨도, 고통도, 슬픔도 내 안에 쌓아두지 않더군요. 왜냐고요? 배설되지 않은 영광, 배설되지 않은 고통은 에고를 키우는 영양제니까요. 그게 늘 신을 가립니다.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향해 묻게 되더군요. 나는 어디로 똥을 누는가.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