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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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그 난리는 우리집을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문구

요런 콩가루 집안의 시대에 선비라는 말이 쑥스럽다면 양반이라는 말은 더 쓰기가 거북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스러운 것이 오히려 미덕인 양 판을 치는 세태에 선비, 그보다는 양반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문학동네의 일꾼이 있었으니 그가 명천(鳴川) 이문구다. 명천은 1941년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관촌부락에서 조선조의 석학 토정(土亭)이지함의 핏줄을 받은 한산(韓山)이씨네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증조 할아버지가 상주목사를 지냈고 할아버지가 토정의 제향을 올리는 사액서원인 '화남서원'의 도유사이니 그 가르침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광복과 더불어 토지분배로 아버지가 사법서사 일을 했으나 6.25전쟁 중 보령군 남로당 총책이었던 아버지와 두 형을 잃는다.

56년에는 어머니마저 여의고 열다섯 나이에 가장이 되어 중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행상으로 떠돌다가 61년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입학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63년 '현대문학'9월호에 '다갈라 불망비'를 김동리가 추천한 뒤 삼년 만에 '백결'로 추천이 완료되는 것을 보아도 그의 소설공부와 뒤에 깔려 있는 고단한 삶을 읽게 한다.

명천이 소설가가 된 이면에는 남모를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남로당의 지역 총책이었던 아버지의 죽음만이 아니라 두 어린 형들까지도 '웬수를 갚을 지도 모르는 빨갱이의 씨'라는 이유로 대천 앞바다에 생으로 빠트려 죽이는 참변을 당했으니 장차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그런 날벼락을 맞은 명천은 우연하게 한 신문기사를 읽는다. 대구의 한 시인이 부역한 죄로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구상이 경무대 대변인인 김광섭에게 부탁, 대통령 우남(雩南)의 수결 하나로 그 시인이 방면된다는 것이었다.

"글을 쓰자. 그러면 산산조각난 우리 집안을 무사하게 만들겠구나" 하고 명천은 춘원의 소설부터 읽기 시작한다. 그냥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라 쓰자고 읽자니 춘원의 문장이나 사실 묘사를 따라잡기에는 아득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문이 살고 내가 사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 하고 명천은 밑바닥 일을 다 훑으면서도 소설쓰기에 온 힘을 다했다.

맛깔나는 충청도 사투리와 구성진 입담은 금방 소설의 재미를 붙여 화제작이 되었고 장편 '장한몽'으로 필력을 내뿜더니 72년부터 연작소설 '관촌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인 관촌이 시사하듯 이 소설은 그의 생장과정을 낱낱이 그려낸 것인바, 민족사의 비극을 가장 아프게 체험한 기록이 온전히 담겨 있다.

'관촌수필'은 KBS가 드라마로 방영을 했는데 열여섯살 명천의 형이 바다로 끌려가 수장되는 장면을 그때의 사람들이 안방에서 보고 있었다니, 그 마음 어떠했을까?

양반의 뼈는 밤에 만져봐도 안다고 했던가! 그런 역경을 겪은 사람같지 않게 명천은 늘 생각과 몸가짐이 발랐다. 한때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중심 인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족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으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고 폭넓게 문단을 보살폈다.

특히 동리를 위하는 그의 한결같은 마음은 시류에 곧잘 표변하는 우리에게 매운 회초리를 준다. 문학으로 삶으로 본보기가 된 명천, 제2, 제3의'관촌수필'을 가슴 안에 담아두고 지난 2월 25일 밤 눈을 감았다. 못난 나를 선배랍시고 잘 따르던 명천형, 그 관촌수필 내 얘기인 것도 아시지요.

이근배<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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