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평등주의'에 좌절한 삼성의 채용 실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경제부문 기자

삼성 고위 관계자가 29일 오전 기자실을 찾았다. 이날 열린 사장단 회의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지만, 분위기는 유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조간 신문 대부분이 ‘삼성 새 채용제도 무기한 유보’ 기사를 도배한 터였다. 이 관계자는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삼성그룹이) 중상을 입었다”고 짧게 소감을 남겼다. 전날 이미 유보 발표와 함께 “혼란을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를 한 뒤라 더 이상의 할 말도 없었다.

 지난 주말 내내 인터넷과 정치권·대학 등 곳곳에서 삼성의 새로운 채용제도가 대학 줄세우기, 호남 차별, 여성 차별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여론의 부정적 반응을 예상치 못하고 서투르게 일을 처리한 것이 초일류 기업 삼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삼성 내부에서도 “대학 줄세우기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다양한 시각 속에서도 여전히 남은 고민이 있다. 한국의 대학과 사회가 삼성의 채용 실험을 섣부르게 거부한 것은 아닌지, 지나친 기계적 평등주의에 매몰돼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당장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오는 4월 삼성 상반기 공채시험에는 예년처럼 전국 100여 개 고사장에 국내 대졸자의 20%가 넘는 10여만 명의 청년이 몰려들 것이다. 삼성이 이날 하루를 위해 치르는 비용만 100억원에 달한다. 학원가에는 계속 ‘삼성고시반’이 운영될 게 뻔하다. 재수·삼수를 해서라도 삼성맨이 되겠다는 청춘들이 ‘삼성고시 낭인’으로 학교와 학원가를 돌아다닐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 중 ‘호남 차별’은 과연 온당한 주장일까. 대학별 총장 추천 인원은 대학별 학생 정원과 비례해서 정해졌다. 학생 수에 따른 차이이지, 지역 차별은 아니었다. 삼성은 전체 공채의 35%를 지방대에서, 5%를 저소득층에서 뽑는다. 호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저소득층 선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총장 추천 철회’를 위해 삼성에 전화했다는 강운태 광주시장이 이 같은 내용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여성 홀대’ 비난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삼성은 정원의 최소 30%를 여성에게 할당한다. 여성 차별 비판은 삼성이 필요로 하는 이공대생이 상대적으로 적은 여대의 속상한 심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삼성은 28일 전면 유보 발표를 하면서 “학벌과 지역을 넘어서는 열린 채용에 대한 연구 검토는 계속한다”고 밝혔다. 모쪼록 머잖은 시일 내에 합리적이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얻어낼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때는 사회적 논의도 보다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최준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