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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장-5인의 「김일성」|이명영 집필 성균관대교수·정치학<제자=김홍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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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사람이 아닌 김일성-. 우리들에게 전설적으로 전해오던 김일성이 실존했었고, 그 이름을 도용하는 김일성이 있다. 그래서 이 글에「진위」와「열전」을 붙인다.
실존의 김일성도 한사람이 아니다. 북한의 김성주가 김일성을 자칭하기 훨씬 전에 이미 김일성은 네 사람이 있었다.
최초의 김일성 장군은 1907년 의병전쟁 때의 의병장 김일성(함남 단천 출신)이며 두 번째의 김일성 장군은 1919년부터 무력항일투쟁에 나섰던 일본육군사관학교출신 김일성이다. 의병장 김일성은 1926년에 이 세상을 떠났고 육사출신 김일성도 같은 해인 1926년을 고비로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3번 째 김일성 37년에 전사>
지금의 50대 이상이 어릴 때부터 들어온 애국투사 김일성 장군의 얘기는 이 두 사람의 항일 투쟁상이 혼성되어 한 사람의 생애처럼 전설적으로 전해 온 것이다(이 글에서는 이 김일성을「옛 김일성 장군」이라 부름).
세 번째로 실존한 김일성은 1935년부터 만주의 중국공산당유격대의 한 대장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 부대의 정식명칭은「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사」였다가 얼마 후에「동북항일연군 제1노군 제2군 제6사」로 바뀌었는데 그 사장의 이름이 김일성이었다.
그는 한인이었다. 옛 김일성 장군과는 물론 다른 인물이었으며 더욱이 북한의 김성주는 아니다. 이 글에서 제6사장 김일성으로 부를 이 사람은 1937년11월에 전사했다.
중공유격대의 제6사장 김일성이 전사한 다음 그 부대장 자리를 이은 사람도 한인이었으며 그는 김일성이란 전 부대장 이름을 그대로 썼다.
이 김일성은 후에 부대개편으로 동북항일연군 제1노군 제2방면군의 군장이 됐다. 앞으로 이 글에서 제2방면군장 김일성으로 쓸 이 사람은 1940년12월에 일본군 토벌대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운명했다.

<4번 째 김일성도 40년 사망>
이들 김일성은 1945년 해방 이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나 그 이름만은 널리 알려졌고 그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다.
그 유래 있는 이름의 도용과 투쟁 역정의 표절을 바로 북한의 김성주가 했다.
다른 몇 사람이 같은 이름을 쓰는 동명 이인의 경우도 있으며 저항운동가·비밀행동 원이 본명을 숨기고 변명을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또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선임자·선배의 이름을 공연·정대히 계승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이름을 쓰면서 그 경력·생애까지를 자기 것으로 억지를 쓴다면 결코 떳떳치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은 사술에 지나지 않는다. 항일투쟁 경력의 날조를 위해 북한의 김일성은 본명에 관해서 조차 사술을 썼다.
북한에서는 그들 지배자 김일성의 본명을 김성주라고 했으나 실은 김성주다.
김성주가, 아니라 김성주임은 그의 소학시절의 급우와 청년시절의 친구·지인들이 증언하고 있으며 일제의 길림 총영사관보 고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라는 이름의 도용과 그 투쟁사의 위작을 위해 김성주라는 유사본명을 씀으로써 정체규명에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북한주둔 소련군의「로마넹코」정치사령부에 의해 만주의 중국 공산당 유격대일원이었던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가장된 이래 그를 유일 최고의 항일투쟁명장으로 날조하는데는 북한의 소위 최고학술기관인 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수많은「연구사」들을 비롯하여 재일 조총련의 수많은「일꾼」들이 동원되었다.

<항일투쟁 김일성으로 각색>
북한주민들은 그렇게 해서 조작된 김성주의 거짓 항일투쟁사를 이른바「혁명전통학습」이라 해서 줄줄이 외야 한다. 또 북한의 세계를 향해 날조된 역사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어 외국사람 가운데는 김성주의 항일투쟁·혁명운동을 의심치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오류는 인간 김성주의 평가 뿐 아니라 북한지배집단의 성격규정까지 오도할 위험이 있다.
일제 때의「김일성 장군」얘기는 광복을 찾고자 했던 겨레의 염원과 투쟁에 무한한 용기와 신념을 주었다. 그 이름이 김일성인지 김일성인지 김일성인지 또는 김일성인지 조차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한만·한노국경 지대에서 무장 병력을 거느리고 일군과 투쟁을 벌인다는 얘기가 이미 1907년에 알려졌고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그 이름이 더욱 널리 번졌다. 이것은 망국민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단순한 영웅대망심리는 결코 아니었다. 실로 처절한 항일투쟁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 영웅대망심리를 이용한 연극이 해방되던 해 가을 평양에서 벌어졌다.

<김성주의 정체논의는 금기>
1945년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김일성 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화」에 나오는 시민들은 백발이 성성할 항일영웅 노 김일성 장군의 모습을 그리며 마음 설랬다.
이 흥분은 불과 몇 분 후에 차디차게 식었다. 「로마넹코」소장의 소개로 등단한 김일성 장군은 새파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김성주의 이때 나이 33세. 노장군을 그리며 평양 안팎에서까지 찾아온 촌노와 시민·부녀자들 아무도 그를「김일성 장군」으로 생각지 않았다. 『저렇게 애숭이 일수가 없다』『소련군의 앞잡이처럼 나설 수가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가「김일성 장군」의 강연에는 외국어를 번역한 듯한 부자연한 문귀도 많아 감동은 커녕 불쾌감을 모두 느꼈다.
그로부터「김일성 장군」과「김성주」의 이동점은 북한에서 금기됐다. 김성주가 1910년대의 옛 김일성 장군도, 1930년대의 유격대장도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밝히지 못한 채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위작·미화되고 항일투쟁사가「김성주」를 위해 각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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