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 대륙붕 분쟁을 공동 개발형태로 해결한 한·일 협의 과정에는 기·복이 많았다. 우리의 자연 연장이론과 일본의 중간선 원칙이 맞선 가운데 해결책으로 나온 공동 개발안은 우리 정부가 안출해 낸 것.
공동 개발은 정부가 의뢰한 미국제법학자 프리드먼 교수와 이 문제 연구를 맡겨 미국에 유학시켰던 우리 외교관의 일치된 결론이었다고.
프리드먼 교수는 우리에게 논문을 건넨 며칠 뒤 갱에게 피살됐다.
정부는 공동개발 방식을 결정한 뒤에도 겉으로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다가 박대통령이 72년 9월 오오히라 일 외상에게 전격적으로 이를 제의, 동의를 받았다.
69년 북해 대륙붕 분쟁에 대한 국제사법 재판소의 판결 과정과 71년 인니와 호주간에 공동개발이 제기된 적은 있으나 실제로는 세계초유이기 때문에 협상자들이 무척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