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독어 소설 잘 쓰는 후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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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30면

독일에 사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끔 인터넷으로 칼럼 보는데요. 감성이 여전하시더라고요.”

후배는 독일에서 공부와 사업을 함께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쁘다. “그 사이 건강이 좀 안 좋았어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고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건 그렇고 형 소설 한번 써보는 것 어때요? 짧은 소설. 페터 빅셀이라는 사람 책 한 번 읽어보세요. 『책상은 책상이다』 그런 글 얼마나 좋아요. 형이 그런 글 쓰면 꽤 쓸 텐데. 제가 요즘 그 장르에 미쳐 있어요. 로망보다 더 묘미가 있어요.” 그 무슨 자다가 국제전화 걸어서 소설 쓰라는 소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소설은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나는 한참 멀었다고 말했다.

“깊이 있는 글 독자들이 기피해요. 깊이는 작가가 의도해서 만들기보단 글을 읽는 독자와 함께 만들면 되잖아요. 형 글은 잘 들려요. 잘 읽히는 것과는 조금 다른데. 그게 잠깐만요.” 후배는 한동안 말이 없다. 아마 잘 읽히는 글과 잘 들리는 글의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느라.” 후배의 말은 잘 들렸다. 대중적인 글이 좋은 글은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대중적인 글쓰기를 18세기엔 혁명적인 글쓰기라고 했어요. 글의 권위가 독자로부터 생겨나는 거 아닌가요? 예전엔 귀족들이 자신들도 잘 모르는 비문법적 라틴어로 글을 쓰며 권위를 지키려고 했죠. 그런 권위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시기가 작가가 생기고 독자가 생기던 시점이죠.” 후배는 점점 어려운 말을 했다. 나는 어려운 글, 긴장된 글, 밀도가 높은 글도 필요한 것 아닌가 물었다.

“물론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죠. 소설은, 특히 엽편소설은 덜 긴장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모든 글이 논문 같을 필요가 있나요? 일단 문학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 형이 쓰는 글처럼 해이한 글이 참 좋던데.” 그 말에 마음이 살짝 해이해진다.

“형의 글은 해이하지만 그렇다고 부실한 것은 결코 아니에요. 혹시 형 삐쳤어요? 삐쳤구나. 그건 아닌데. 저도 형처럼 해이한 글 쓰고 싶어요. 알리 알죠? 해이하게 권투를 하죠. 예술이에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삐쳤느냐는 후배의 말이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것 같다. 휴대전화기가 뜨겁다. 나는 슬슬 대화를 정리하고 싶다.

“여기는 지금 새벽 4시 50분입니다. 뭐든 이 시간이 가장 잘 돼요. 상상도 공부도 글쓰기도 말이죠. 황현산 선생 책 제목처럼 밤이 선생이라서요.” 후배는 이제 본론을 시작한다.

“형 저 창작 다시 하고 싶어요. 그게 꿈입니다. 공부보단 창작에 더 애착이 가네요. 아니 공부할수록 더 애착이 가요. 공부는 못하더라도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창작이 안 되면 정말 힘들어요.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엄살이나 겸손이 아니라니까요. 하여간 전 창작할 겁니다. 우리 교수가 좀처럼 칭찬을 안 하는 분인데 몇 년 전에 그분이 정말 진지하게 말했어요. 저보고 소설 잘 쓴다고요.”

나 역시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진심이었다. 후배가 하는 마지막 말을 듣고 더욱 확신이 생겼다.

“제가 쓴 논문 보면서.”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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