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대장' 일본 산토리 위스키 업체 빔 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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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산토리 맥주와 야마자키 위스키로 유명한 일본 주류·음료업체 산토리는 글로벌 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1899년 설립돼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매출의 80%가 일본에서 일어나는 소위 ‘골목대장’에 불과했다. 그런데 산토리가 13일(현지시간) 전 세계 금융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산토리 홀딩스가 미국 대표 위스키업체 빔을 인수한다는 발표 때문이었다. 인수가액만 160억 달러(약 17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인수합병(M&A)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구글이 스마트홈 분야 기업인 네스트를, 페이스북이 인터넷 토론장 서비스인 브랜치(branch.com)와 포틀럭(potluck.it)을 각각 인수했지만 산토리의 빔 인수 소식에 묻혔다. 시장이 놀란 것은 산토리의 대담한 구상이다. 산토리는 글로벌 시장에서 매출규모로 15위 업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 4위인 빔을 인수하면 연 매출이 43억 달러로 불어나 단번에 세계 3위 주류 업체로 올라서게 된다.

 내수에 사활을 건 산토리의 고민은 빨라지는 일본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였다. 산토리는 돌파구를 해외에서 찾았다. 최근 버번위스키의 빠른 성장세가 구미를 당겼다. 일례로 빔이 만들고 있는 프리미엄 버번 위스키는 생산량이 수요를 못 맞출 정도로 인기다. 빔 인수 후 산토리는 북미 수익이 60%, 유럽과 중동 수익이 20%인 글로벌 업체로 거듭나게 된다. 시장에선 산토리가 빔을 비싸게 샀다는 분석이 많다. 빔의 인수가격은 주당 83달러50센트로 지난 주말 주가보다 25%나 높았다. 데비슨 앤 코의 티머시 래미 애널리스트는 “거의 최대 가격을 치른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지 노부타다 산토리 사장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강력한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가진 주류 기업이 탄생할 것”이라고 의지를 불태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인들은 빔이 일본 기업에 넘어간 것을 애석해한다. 가장 미국적인 기업 하나가 또 해외로 팔려갔다는 식이다. 뉴욕타임스 가 관련 기사 리드를 “버번만큼 미국적인 술은 없다”고 시작한 것은 이번 M&A에 대한 미국 내 정서를 대변한다. 빔은 1795년 이래 가업으로 버번 위스키를 만들었다. 금주법이 1933년 폐지되자 제임스 빔이 자신의 이름을 딴 ‘짐빔’을 생산해냈다. 이 회사의 3대 상품인 짐빔, 메이커스 마크, 놉 크릭은 미국 애주가들이 자랑한 버번이었다.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로 나와 인기 절정이었던 숀 코너리가 광고 모델로 등장하는 등 유명 영화배우들이 짐빔의 단골 모델이었다.

 세계 주류산업 사상 세 번째 규모인 이번 M&A는 일본 기업의 해외 M&A 중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이기도 하다. 앞으로 관련 업계에 살아남기 위한 M&A 태풍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작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번 M&A의 배경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아베노믹스’가 일본 기업을 한층 더 공격형으로 진화시키고 있다는 증거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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