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으로 빚은 국산 오미자 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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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호 23면

필자가 노 양조가를 처음 만난 때는 3년 전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유명 주류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시골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젊은 시절 자신에게 약속했던 하나의 과업(?)을 인생 후반에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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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업의 시작은 이랬다. 그는 30대에 스코틀랜드로 술 유학을 떠났다. 어느 날 담당 교수가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 나라의 술을 갖고 와 시음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가 가져간 한국 전통주는 그들이 원하는 술 맛의 개념과 많이 달랐고 “조미료가 너무 가미됐다”는 교수의 농담까지 들어야 했다. 또한 그 자리에서 프랑스 여학생이 갖고 온 로제 샴페인을 생전 처음 마셔보고 큰 충격을 받는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 그가 ‘언젠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진정한 술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다.

퇴직 이후 그는 샴페인 지역을 열 번 정도 방문하며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현지 전문 연구소의 도움도 받아보려 했지만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경험을 총동원해 독자적인 연구를 한 끝에 드디어 오미자를 사용한 스파클링을 얻는 데 성공했다.

오미자는 흔히 다섯 가지 미각(신맛·단맛·쓴맛·짠맛·매운맛)을 느낄 수 있으며 약재로서의 효력도 있다고 알려졌다. 오미자를 1차 발효시켜 로제 와인을 만들고 다시 병 속에서 2차 발효를 통해 기포를 탄생시켜 스파클링으로 만든 것이다.

이 와인은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샴페인 제작 방식을 사용해 만든 최초의 스파클링이 되었고 맛과 색도 훌륭했다. 처음에는 연분홍 빛을 띠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맑은 홍색을 보이는데 잔에 따르면 작은 기포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처음에는 병의 압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차 발효로 생긴 찌꺼기를 제거하는 기계가 없어 수동으로 처리했다. 샴페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동 페리뇽 수도사 역시 초창기에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기계를 들여왔지만 이번에는 완벽히 다루는 기술자가 없어 보완과 배움을 계속해 나갔다. 오래 전 미션을 주었던 로제 샴페인의 맛을 기억하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이 양조가의 스파클링은 조금씩 품질이 나아졌고 결국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공인주로 서비스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노 양조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품질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 식품 박람회에 참석했고 여기서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덕분에 샴페인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까지 진출하게 됐다. 필자도 함께 참석해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분으로서는 파리에서의 매일매일이 기쁨과 흥분의 나날이었으리라.

2000년도 중반 작은 시골에서 시작된 과업은 이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초창기 한 가지 제품에서 오리지널 스파클링과 조금 더 가볍게 만든 대중성을 가진 스파클링, 그리고 프랑스 오크 통에 숙성시킨 스틸(거품이 없는 와인) 와인으로 종류도 늘어났다.

새로 지은 양조장은 오미자 밭이 정면에 보이는 문경 새재 천년 주막터 자리였다. 오미자의 약효 때문인지 이것으로 만든 스파클링은 깔끔하면서 여운이 길다. 오미자 스틸 와인은 양념이 강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음식과 조화를 이루는데 특히 매운맛이나 비린 맛에 더 잘 어울린다. 마음 속 품고 있던 로제 샴페인이라는 꿈을 오미로제 스파클링이라는 현실로 완성해낸 노 양조가의 집념에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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