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0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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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퇴 양난>
박헌영에 대해 내린 미군정의 체포령은 그 자신에게는 3가지 의미에서 충격적이었고 이 타격은 결과적으로 공산당과 박헌영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3가지 면에서 타격을 주었다는 것은 박헌영이 37선 이북에 있음으로써 서울의 당을 직접지도할 수 없다는 것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쳐가 북쪽에 제한됨에 따라 자신의 안전 보장이 김일성의 손에 달려있게 되어 당내지위가 현저하게 박헌영에게 불리하게 된 것이다.
또 박헌영이 서울탈출 때 자기의 대리로 이주하를 지명했었는데 그가 경찰에 일시 체포되었기 때문에 뜻밖에 이승엽이 박헌영의 대리행사를 하게된 사실이다.
본시 이승화은 일제 때 전향하여 인천식량 영단의 이사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기에 적지 않게 당황했던 사람의 하나이다. 그래서 황황히 장안파공산당에 참가했다가 며칠 뒤에는 재건파에 동조했으나 떳떳치 못한 과거 때문에 주요간부직에는 끼지 못해 초조한 얼굴
로 자주 해방일보의 조두원을 찾아 다녔었다.
그 당시는 아무도 이승엽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으며 나 자신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기에 인사도 잘 하지 않았던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이승엽은 제2차 공산당시대에 조두원과 같이 입당했었기 때문에 그 와는 친했는데 앞서도 말했듯 조두원 역시 일제말기에 전향, 대화숙에서 반공논문과 반「스탈린」논문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감히 공산당에 입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그런 사람이었지만 박런영이 어쩐 일인지 조두원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이란 직책에까지 중용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박헌영과 조두원의 사이를 아는 이승엽은 조두원을 통해 박헌영과 접근하기 위해 매일같이 신문사로 조를 찾아다녔다.
내가 알기로는 조두원은 충청도출신의 어느 포목상 딸에게 재취장가를 들었는데 인물이 잘 생긴 처제를 박헌영의 비서로 들여놓는 공작을 폈고 이어 성공했다.
성이 윤씨인 조두원의 처제는 박헌영이 월북하자 뒤 따라 평양으로 넘어갔으며 이북에서는 비서직이 아닌 아내 노릇을 했다. 말하자면 박헌영은 조두원의 동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조두원은 박헌영의 제일 가는 심복이 되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월북 후 그 대리인으로 지명된 이주하가 미군정과 경찰에 체포되자 조두원은 이승봉을 이주하 대리로 추천했다.
이승엽도 비상히 영리하고 재주도 있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으로 이승엽이 박헌영의 눈에 띈 것은 전국 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조직을 둘러싸고였다.
「지까다비」(버선신)를 신고 매일 같이 초조한 얼굴로 찾아다니는 이승엽을 보다 못한 박헌영이 우연한 기회에 전농조직임무를 주었는데 그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하고 밤잠을 자지 않고 조직에 몰두해 훌륭히 임무를 끝냈다.
이로 인해 박헌영은 이승엽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소위등서인 조두원이 자꾸 추천을 하는 바람에 이승엽을 비약적으로 발탁하게된 것이다.
그 당시 박헌영으로 보면 오랜 동지인 김형선이 있었고 또 직계부하인 김삼룡이 있었으나 조두원의 강청으로 김형선을 소외하게 되었고 김삼룡역시 이승엽보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물리쳤다고 한다.
이승화으로 보면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당시 만해도 이승엽보다 서열이 높은 이정윤 김삽수 강진 등 6명의 반주류파의 주요간부들이 당에서 제명당했기 때문에 그가 급격히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즈음 평양에서 반박헌영파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도운 최창익은 중앙당학교에서의 강의도중 『남반부에서 3당 합당을 한다더니 1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6당이나 되었다』며 서울의 공산당을 비웃는 말을 했다 한다. 서울에서 쫓겨온 박헌영을 얕잡아보고 한말인 듯 하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남한출신의 학생들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자는 누구냐. 그 말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윈회를 모욕하는 발언이니 곧 취소하라』고 요구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 사건이 표면화하는 것을 두려워한 김일성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직접 중앙당학교에 나가서 남한출신의 학생들을 달래서 겨우 수습했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10월 하순에 열린 북로당중앙위에서 다름 아닌 최창익 자신이 자기들이 조정한 문갑송 김근 위진 등 6명을 가리켜 분열주의자며 반당분자라고 극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약에 박헌영이 미군정의 방해와 김일성의 분열책동 때문에 3당 합당을 하지 못하고 남로당을 결성하지 못하였더라면 이 질책은 문갑송 강진 등이 아닌 바로 박헌영의 머리 위에 퍼부어졌을 젓임이 틀림없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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