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 땅에 '문제 해결형 민주주의'는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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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울림이 없는 공허한 주장들의 세 가지 특징. 죄의식이 없고, 수치심이 없고, 자기 탓이 없다. 어제 대선 1년을 맞은 한국 사회는 교통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민주당은 자기들은 열심히 했는데 상대방이 발목을 잡아 상황이 악화됐다고 남 탓만 할 뿐이다. 집권세력의 ‘원칙 민주주의’와 야당 세력의 ‘투쟁 민주주의’가 득세한 1년이었다. 정의를 독점한 듯한 양쪽의 과잉 신념 속에서 문제 자체를 풀어보겠다는 책임감은 찾기 어려웠다. 이 땅에 원칙과 투쟁을 넘어선 ‘문제 해결형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일까.

 지난 1년을 평가하면서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이 “가장 억울한 게 불통이라는 비판이다.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 입장에서 불통이라고 한다면 그건 자랑스러운 불통이다”라는 취지로 말을 했는데 여간 유감스럽지 않다. 국정의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청와대에 ‘자랑스러운 불통’이란 있을 수 없다. 대통령의 언어관리자가 사용한 이런 용어는 반대 세력의 감정을 쓸데없이 자극하는 것으로 현명치 못하며 아마추어 같은 느낌마저 준다.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반대층의 입장에서 그들의 얘기를 정성스레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건 사실 아닌가. 선거는 승리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정치는 경청의 논리가 더 값지다. 반대자들은 종종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더라도 집권세력이 진지하게 들어주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곤 한다.

 김한길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은 이날도 청와대와 집권세력을 향해 불통 타령만 했다. 한국 정치가 오늘날처럼 무기력하게 교착된 건 ‘더 큰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실체 외면과 절차 무시, 과장된 해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운동권 민주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당 안팎에 널리 퍼진 이 세력은 ‘국가기관의 여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합법적으로 진행된 대선 결과까지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30년 전부터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운동권 민주주의 습성은 이제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문제 해결력을 키우는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국정원 선거 개입과 대통령의 권위주의에서만 오는가. 민주진영의 정책적 무능이 민주주의 위기의 진정한 본질이다”라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는데 정곡을 찔렀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고 역사이자 태도이기도 하다. 법과 원칙의 민주주의가 제도라면 투쟁과 운동권 민주주의는 역사일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태도로서의 민주주의, 문제 해결형 민주주의로 진전시키는 논의가 시작돼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