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한국서예 청년작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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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현대에서 죽어가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컴퓨터가 손으로 쓰는 글씨마저 대체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붓을 들어 글을 짓고 마음을 닦던 전통은 유물로 박물관에 들어앉는 중이다.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막을 올린 '한국서예 청년작가전 1988~2003'은 침체된 서단을 되살리려는 마지막 불씨 같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큐레이터가 "서예를 우리 시대에 다시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감의 결집체"라고 부를 만한 기획전이다. 15년째 한국 서예의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작가를 키워온 이 전시는 그동안 2백 90명의 서예가를 배출해 우리 서예계의 허리를 든든히 받쳐왔다.

'한국서예 청년작가전'의 15돌 기념전 성격을 지닌 이번 전시는 역대 출품작가 2백37명의 작품 2백70여 점을 3부에 걸쳐 선보이며 그 평가와 반성을 겸하고 있다.

대상작가를 20대에서 30대로 한정하고, 선발 방식을 과제작과 현장 휘호로 병행한 결과 서숙(書塾)의 계파를 뛰어넘는 다양한 작가군과 다채로운 서체가 나온 점은 성과다. 전통 서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실험작업이 많아졌다. 기(氣)에 기초한 조형서예를 일구는 여태명씨의 '천.지.인'(사진)를 비롯해 유재학.여태명.황석봉.전경택씨의 작품들이다.

또 다른 결실은 1992년 원광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과 대학원에 생긴 서예과 출신들의 약진이다. 실기와 이론을 아우른 이들이 청년작가전에 진출하는 비율이 해마다 증가해 2002년 15회전에는 80%인 25명이 서예과를 나온 작가였다.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는 남았다. 작가들이 작품의 소재로 삼는 글이 자신의 사유나 삶에서 뽑아낸 것이 아닌 제3자의 것에 머물고 있어 관람객과 적극 소통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서예가 시대정신을 담고, 현실과 함께 호흡하려면 작가의 체험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데 다른 이의 문장을 가져다 쓰는 행위에서는 그런 융합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0일까지. 02-580-1511.

정재숙 기자

<바로잡습니다>

3월 12일자 S10면 '젊은 작가의 실험성 서예계 불씨 살린다' 기사에 소개된 도판은 황석봉씨의 '불립문자'가 아니라 여태명씨의 '천.지.인'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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