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제 29화><조선어학회 사건>(8)<제자 정인승>정인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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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문 계속>
취조관들이 밤사이 서로 모여 머리를 짤 대로 짜서 다음날 내놓은 심문이란『사건에 왜 임진왜란이라고 왜 자를 썼느냐』『동경이란 말을 간단히 설명하고 경성에 대해서는 왜 자세히 늘어놓았느냐?』『태극기·무궁화란 낱말을 집어넣은 것이 수상하다』는 등이었다.
하루에 번갈아 한글학자 댓 명은 연무장에 불러나가 이같이 한결같은 질문을 받아가며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다.
나를 맡은「시바따」는 참으로 엉뚱한 자였다.
내가 홍원으로 끌려가 갇힌지 닷새만에「시바따」는 나를 끌어내어 앉히고는 우선 매부터 들고 한차례 때렸다.
「시바따」는 생리적으로 매를 때리는 것에 쾌감마저 느끼는 듯 한차례 매를 들고 사람을 치면 칠수록 흥이 나는지 그의 매는 더욱 사나와지고 매서워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흥이 난 듯 나를 친 후「시바따」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이때만 해도 어느덧 나는 매에 익숙해있어 매를 참아나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다. 우선 매를 맞으면 내 몸을 내 몸이라 생각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그 아픔을 이겨 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아픔에 못 견딘 신음소리도 이제는 속으로 스며들며 전처럼 밖으로 소리쳐 나오지도 않았다. 「시바따」가 입술을 악물더니 소리쳤다.
『너는 악질 중에 악질이야.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이극로와 너는 밤낮 붙어 앉아 밀의를 했지? 이극로는 대통령이 되고, 정인승 너는 문부 대신이 되고, 아무개 아무개는 어느 어느 부서에 앉힌다는 편성 배치를 했지? 다 알구 있는 일야. 사실대로 말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소위 조선어학회가 조각 모의를 했다니 말이다.
「시바따」는 어이없는 표정을 내가 짓자 자기는 멋 적은지 빙그레 웃더니
『사실대로 자백해』하고 다시 매를 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터무니없는 자백을 함흥에서 강요받아 지장까지 찍었는데 또 홍원에서도 똑같은 고문과 취조가 거듭되었다.
넓은 연무장 이곳 저곳에서 여러 동지들의 신음소리는 을씨년스럽게 높은 연무장 천장에 메아리 졌다.
홍원 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인「야스따」도 가장 악질적인 고문방법으로 우리동지들의 치를 떨게 했다. 일본인 취조관도 있었지만 한국인이 더욱 악질로 악랄한 취조수법을 썼다.
이윤재와 이희숭을 맡고있던「야스마」는 이 사건을 저음부터 발단시킨 자로서 횡포가 심했다. 그때만 해도 정말 우리 한글 학자들은 순하디 순한 어린양이었다.
고문도 처음 당해볼 뿐만 아니라 경찰서에조차 처음 가본 것이었으며 유치장 신세도 처음인 처지에 주리를 틀리니 처음에는 그들의 소위 자백 강요에『아니라』고 몇 마디 부인도 해보았으나 거의가 다 결국 매에 못 이겨 저네들이 했다고 하는 사실에 아니라고 다시 버티어 볼 한 가닥의 용기조차 모두 잃어 버린지 오랜 몸들이었다.
특히 비행기 태우기란 고문을 당하고 나면 열이면 열 모두 얼이 빠져 그저『사실이지』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만이 저절로 끄덕여졌다.
비행기 태우기란 두 팔을 등뒤로 젖혀서 두 손을 한데 묶어 허리와 합께 동여놓고 두말과 등어리 사이로 목 총을 가로질러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밧줄을 묶어 연무장 대들보에 매어 달아 놓고 빙글빙글 돌려서 밧줄을 꼰 다음 탁 놓으면 빙글빙글 빨리 돌아 정신을 잃게되는 것이다.
거기다 십자가모양 매어 달린 팔이 비틀려 그 아픔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고문을 그들은 공중전이라 불렸고 물 먹이기를 해전, 죽도나 목총으로 마구 때리는 것을 육전이라 했다.
이밖에 그들은 양처럼 순한 우리동지들을 넓은 연무장에서 치옥을 줌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가하기도 했다.
축 얼굴의 반면에 먹칠을 하고 등에다『나는 처언자 입니다』라는 일본말을 써 붙이고 같은 동지들 앞을 돌아다니게 하면서 또 입으로『나는 허언자니 용서하십시오』라고 사과를 시키는 일이었다.
더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같은 동지끼리 서로 목총으로 때리게 하는 일이었다.
가만 가만히 때리면 더 세게 때리라고 얻어맞았다. 할 수 없이 입을 악물고 세게 때리면서 눈들을 홀리는 광경이 이곳 저곳에서 지어 졌다.
우리들은 날이 새면 오늘은 어느 누구에게 봉변을 가하거나 당하게될까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취조관들의 고문은 그래도 비명을 질러가면서도 잠을 수 있었으나 서로 때리게 하는 것은 가장 뼈아픈 저주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저네들은 더욱 의기가 양양하여 이런 눈물겨운「피에로」짓을 자주 거듭시키는 것을 즐기는 기미마저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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