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日 번화가 '불황의 빛과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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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 도쿄(東京)의 아카사카(赤坂)거리는 고급 술집과 특급 호텔이 밀집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아카사카미쓰케(赤坂見附)역과 바로 연결돼 있는 '베루비(belle Vie)'란 백화점의 명성은 대단했다.

우리로 따지면 서울 강남의 유명한 백화점 명품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전세계 최고급 브랜드 옷과 액세서리 등이 즐비했다.

가격이 무척 비싼데도 언제나 고객들로 붐볐다. 적어도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최근 기자가 특파원 발령을 받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하에는 저가 할인점이 들어서고 대부분 의류 매장도 큼지막하게 특별 할인을 알리고 있었다.

'50% 이상 할인'이란 종이를 붙인 자전거를 가게 앞에 버젓이 내놓고 손님을 끄는 '품위 없는(?)' 가게까지 등장했다.

백화점뿐 아니다. 한 그릇에 1천엔(약 1만원)이 넘지만 수십분 동안 줄을 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고급 라면집들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 '라면 5백70엔-밥 한 그릇 공짜로 드립니다'라고 써 붙인 허름한 가게가 들어섰다.

상인들이 얘기하는 변신의 이유는 간단하다. 비싸게 받아서는 도저히 장사가 안되기 때문이다.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불황이 거리를 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기자를 새삼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간 아카사카 번화가의 문방구에는 20년 전의 '문방구집 아들' 기요타 도시아키(喜代田敏昭)가 '문방구 주인'이 돼 기자를 반겼다.

바로 옆의 '이발소집 아들'이었던 사세 아키라(佐瀨明)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위를 손가락에 낀 채 "난 지금 아카사카 최고의 이발사"란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서점집 아들 구로가와 오사무(黑川修)도 어느 새 서점 주인이 돼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가업(家業)을 이어 받아 분수를 지키며 착실히 살아가는 일본사회의 '기둥'들이었다.

계속되는 불황 속에 일본의 많은 사람이 '잃어버린 10년'을 얘기하며 한숨짓고 있다. 거리의 모습에서도 예전의 활력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변하지 않고 꿋꿋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보통 일본인들의 모습에선 묵직한 '저력'이 느껴졌다.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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