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가야할 길|유진오<신민당 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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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금 신민당은 해야할 일이 태산같은 중대한 시기에 처해있습니다.
내가 이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당이 있고 난 후에 파벌이 있는 것이지 파벌이 당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의「이미지」를 흐리는 파벌간의 과당대권경쟁은 근대적 정당이 되지 못하는 증거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민당은 지금 야당으로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퍽 중대한 고비에 서 있습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남-북 접촉문제에 관해 확고한 정책과 자세를 세워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차관상환문제를 비롯하여 경제불황, 국민의 세 부담과중, 거기다가 8·3사채동결조치로 인한 충격 등... 문제가 허다합니다.
신민당은 이런 중대한 난관을 극복할 야당으로서의 확고한 방안을 마련하여 국민을 위해 싸워야할 때입니다.
야당엔 너무도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제약을 국민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약 속에서도 야당의 길은 있습니다.
그것을 정책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는 참으로 중대한 시기에 처하지 않았습니까. 이 중대한 시기에 등불을 밝혀야합니다.
모든 야당의 논쟁은 우선 정책의 방향을 놓고 시작돼야 하며 거기서 만들어진 등불을 들고 신민당은 뭉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한쪽 파벌을 비난하거나 또는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이런 사태를 가져온 원인이 어디 있든 간에 하루라도 빨리 서로 사명을 깨달아 국민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야당이 이 꼴이 된 것은 양당제도를 확립한다고 무소속 출마를 금지하여 놓은 데 기본적 이유가 있습니다.
양당제도는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확립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정부 수립 후 선거를 거듭함에 따라 군소 정당이 저절로 도태되어 가는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양당제도는 자연스럽게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제도적으로 인공적으로 묶어버린 것이 오늘의 야당이 파벌대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 근본원인입니다.
같은 정당을 하는 사람이라도 의견의 차이가 생겨 같이 일할 수 없을 때는 분당도 가능한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사 분당을 하더라도 국민의 지지도에 따라서 당 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내가 3년 반 동안 야당일선에 섰을 때의 체험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당수로 있을 때 처음에는 파벌이란 없었으면 좋겠다고 느꼈으나 부득이한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은 파벌 때문에 골치를 앓아 중앙상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당에는 유진오를 좋다고 하는 파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또 이와 반대로 유진오를 결정적으로 마다하는 파벌도 없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어떤 파벌도 독자적으로 당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죽 답답하면 당수인 내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지나친 당권경쟁은 자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을 제쳐놓고 파벌경쟁을 하는 것은 국민을 저버리는 처사임을 다시 한번 50만 당원동지 여러분에게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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