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의 민주주의 여정은 계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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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행사 … 초겨울 추위에도 남녀노소 1만여 명 운집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 행사에 참석한 역사학자 존 뵐이 150년 전 링컨의 복장을 한 채 “링컨의 연설은 미국인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링컨의 예언은 틀렸다. 19일(현지시간) 초겨울 바람으로 체감온도가 영하인데도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 모인 1만여 명의 인파가 그걸 증명했다. 80대 노인에서부터 다섯 살 아이까지 가족 단위의 남녀노소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게티즈버그 국립묘지를 찾았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272단어, A4 용지 한 장 분량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연설을 했다. 연설에서 그는 “세계는 우리가 여기 모여 무슨 말을 했는가를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겠지만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서 한 일이 무엇인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150년의 세월이 지난 이날 ‘게티즈버그 전투’는 잊혀진 반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만이 오랜 울림으로 남아 있다. 링컨의 연설이 탄생하기 넉 달 전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는 참혹했다. 사흘 동안 남군과 북군을 합쳐 5만1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베트남전 8년 동안의 미군 사상자 수와 맞먹을 정도다.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을 진혼하기 위해 링컨은 게티즈버그를 찾았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는 명연설을 남겼다.

 이날 행사에서 톰 코르벳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링컨은 그 옛날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민주주의 국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설했다”며 “링컨은 종이에 연설을 썼지만, 그의 연설은 우리들 가슴에 새겨져 있다”고 말했다. 행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샐리 주얼 내무장관은 “우리는 지금 모든 남녀가 평등하게 태어났고 자유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명제를 충족하기 위한 긴 여정에 있다”며 “어떤 말도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미국 연방을 지켜낸 링컨의 말보다 위대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행사장 곳곳에선 링컨의 열병을 앓는 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콜로라도에서 온 역사학자 존 뵐은 링컨의 수염과 모자 등을 흉내 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나처럼 링컨 행사 때마다 대역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협회가 있을 정도”라며 그 수가 140여 명에 달한다고 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욱스베리 초등학교 4학년 오드리(10)는 “링컨의 연설문은 5학년 교과서부터 나와 아직 외우지 못했지만 노예 해방과 민주주의가 링컨의 연설에 담겨 있는 건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링컨 추종자로 유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행사에 불참했다. 백악관에서 민주·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들과 만나 이란 핵, 이민법 등 2013년 미국이 안고 있는 숙제를 풀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구절로 시작돼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도 불구하고 이념 갈등, 정파 대결로 갈라진 미국의 현실이 남긴 숙제였다. 링컨의 질타는 바다 건너 한국 정치에도 예외가 아니란 생각이 문득 스쳤다.

글·사진 게티즈버그=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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