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단강성의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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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묘하게 자살하는 작가들이 많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더욱 그렇다.
「버지니아·울프」가 2차 대전 중에 투신자살한 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절망에서였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총을 쏴서 죽었다. 창조적「에너지」의 고갈을 비관한 탓이라 한다.
자살은 아니라도 자살의 길을 의식적으로 택한 작가들도 많다.「에드거·앨런·포」가 그렇고, 「스코트·피츠제럴드」가 그렇다.
작가는 언제나 인간의 삶의 모습을 추구한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죽음을 가까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작가는 또 병적이라 할만큼 섬세한 신경의 소유자이다. 남달리 좌절감이나 허무감에 사로잡히기도 쉽다.
이래서 자살하는 작가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참다운 이유는 아무도 잘 모른다.
「거트루드·스타인」이 죽기 바로 전에『무엇이 해답이냐?』고 물었다.
얼마 후에 다시 입을 열고『무엇이 문제였느냐?』고 중얼거렸다. 꼭 같은 얘기를 자살하는 문학자들에게도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번에는 또 천단강성가 죽었다. 외신에 의하면「호텔」방에서「가스·파이프」를 입에 물고 숨졌다한다. 역시 자살로 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는 어릴 때 부모와 사별하고,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지만, 조모는 8세 때, 조부는 14세 때 죽었다. 고독과 죽음을 그처럼 뼈저리게 느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병들고 추한 몸으로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늙은 조부를 매일같이 마주하고 있었을 때 그의 어린 마음에 무엇이 아로새겨졌겠는지 짐작할 만도 하다.
그의 문학을 지탱해준 고고한 문학 혼이며, 그의 온 작품에 흐르고 있는 청순한 탐 미성이나 체념의 격조 등도 이런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일본사람들의 독특한 죽음의 미학에 있다. 죽음과 삶의 세계는 일본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분명하게 갈라져 있지 않는 것 같다. 가령 미국의 서부극에서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물체 화된다.
그러나 일본의 극에서는 죽음을 맞는 때부터 실제로 죽을 때까지가 무척 길다. 어떻게 보면 일본의 옛 문학은 모두 이 죽음을 앞둔 동안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여기에 또 죽을 때를 제일 중하게 여기는 독특한 사생 관이 있다. 죽을 때가 아름다우면 온 인생이 아름다 왔다고 여긴다.
추한 꼴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는 천단강성의 평소의 말이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역시 그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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