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 재처리해도 제지 수단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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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력신문인 워싱턴 포스트(WP)와 로스엔젤레스 타임스(LAT)가 5일 나란히 보도한 '미국의 북핵 인정' 뉴스가 맞다면 이는 워싱턴의 대북 '금지선(red line)' 정책의 후퇴를 의미한다.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에 나선다 하더라도 미국이 당장 영변 핵시설 폭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에스에이 투데이도 전날 "북한이 재처리를 시작해도 미국은 당분간 군사대응에 나서지 않을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의 핵 재처리는 '레드 라인'이라고 경고해 왔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핵 재처리와 이를 통한 플루토늄 추출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군사적 대응을 유보키로 했다면 가장 큰 요인은 북한의 재처리를 막을 현실적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이 구사할 수 있는 카드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경제제재 ▶영변 핵시설 폭격 ▶다자간 대화 등 세가지다. 그러나 대북 경제제재에 대해서는 한국이 미온적인데다 중국과 러시아도 반대하고 있다.

북한 에너지 사용량의 50% 이상을 공급하는 중국이 빠질 경우 대북 경제제재는 자칫 '속빈 강정'이 될 공산이 크다. 영변 핵시설 폭격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동맹국인 한국의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이 반대하고 있는데다 영변 핵시설을 폭격한다 하더라도 북한이 별도로 추진 중인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시설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체면을 구기고 북.미 직접 대화에 나서지 않는 한 북한의 재처리 사태는 사실상 막을 방법이 없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의 핵 재처리를 '미국이 인내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으로 간주해 왔다. 북한의 재처리가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촉발하는 방아쇠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최근 들어 금지선이란 용어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5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의 재처리에 대해 금지선이라는 용어 대신 '상당히 중대한 문제(very serious matter)'라고 표현했다.

북한의 재처리에 군사적 대응을 않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방치전략'은 일견 전술적 후퇴의 성격이 짙다. 평양을 본격적으로 압박하려면 오히려 한발 빼는 것이 유리하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추론한 미국의 북핵 대응 시나리오는 다음 수순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재처리에 돌입할 경우에도 미국은 일단 내버려 둔다. 북한이 재처리에 들어갈 경우 북한은 수개월 내 원폭 4~6개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게 된다.

상황이 재처리에서 북한의 대량 핵 보유로 전개될 경우 지금까지 방관자적 자세이던 한국과 중국.일본은 물론 러시아도 일제히 입장을 바꿀 것이다. 북한의 핵 보유는 동북아의 핵도미노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같은 시나리오는 중국으로선 최악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이 대북 제재 카드를 제시할 경우 한.중.일은 물론 러시아마저 미국의 주도에 순순히 따를 것으로 보인다.김정일의 벼량끝 전술에 맞선 부시 대통령도 미국판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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