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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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통령 선거전이 백열화해 가고 있는데, 거리에 나붙은 후보 사진들 중에는 벌써 그 대부분이 찢겨 그 앞을 지날 때는 왠지 가슴이 섬뜩해진다. 아무 죄도 없는데 말이다.
낮에는 그래도 좋다. 인기척이 뜸해진 다음부터가 문제다. 도시 그런 벽보 사진들을 쉽사리, 어린이들의 손이 닿을 곳에 붙인 게 잘못이다. 별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을 뒷골목에까지 붙인 것도 잘못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특정후보 X씨의 사진만이 찢긴 벽보 앞을 지날 때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것을 어찌하랴. 골목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험상궂게만 보인다. 흘긋 뒤를 돌아본다. 지나치던 그 사람과 시선이 마주친다. 꼭 자기가 그 사진을 찢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다. 와락 겁이 나서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간다.
다른 특정후보 Y씨의 사진이 찢겨 있을 때도 겁이 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요새는 선거전술도 고도로 지능화 했다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를 지지한다고 드러내놓고 그 사람을 두둔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X측에서 Y를 비방하고, 탄압하고 있는 듯이 꾸며 간접적으로 Y편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Y의 사진만이 찢겨있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일이다. Y를 돕기 위한 속셈에서 바로 그 Y씨의 사진을 찢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Y의 사진만이 찢겨있다고 마음놓고 그 앞을 지나갈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나치는 사람의 눈초리가 무서운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떳떳하다면 두려워할 게 어디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게 자기 마음 같지 않은 게 요새 세정이다. 또한 모든 것에 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살기가 까다로워진 세태이다.
골목 안에 들어서려 할 때 낯선 사람을 만나면 으례 그 사람은 겁에 질린 것처럼 나의 시선을 피해가며 총총 걸음으로 빠져나간다. 그럴 때면 으례 골목 안 후보자 사진들은 찢겨있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의심하는 것만큼 그 사람도 나를 의심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봄은 꽃의 계절이라지만, 우리네는 불신과 의혹의 계절로 찌들어 가고 있다. 언제부터의 일 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제는 우리도 이런 의혹의 계절로부터 탈출할 만큼 성숙했다고 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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