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교 시절|전숙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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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이화여고를 다니던 때는 벌써 35년 전 옛일이다. 나의 모교는 지금 정동 그 자리 변함없이 서 있으나, 그 속에서 공부하는 고교생 기질에는 과연 격세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당시이고 학생회 일과 도서관 일을 맡아보던 나는 매일 학과가 끝난 후 언덕 위에 있던 조그만 도서실 문을 잠그고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혼자 걸어 내려오노라면 「라일락」향기가 코를 찌르는 내 가슴에 번져오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 나의 고민은 사랑의 고민이 아니었고 일제에 얽매여 살던 자유 없는 국가와 무지하고 가난한 내 민족에 대한 고민이 자나깨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내 가슴 가득히 차있었다.
여름방학이면 우리는 해수욕이나 휴가를 즐기는 대신 봉사대를 조직해 농촌계몽을 다녔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을 때 까맣게 탄 얼굴로 서로 보람찬 봉사 얘기를 재재거리던 일들이 기억에 새롭다. 대개의 고교생은 그것으로 학업을 끝냈었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관한, 또 국가민족에 관한 모든 판가름을 끝내야 하는 진지한 고뇌의 시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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