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지난 시간과의 화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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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호 27면

출가하고 몇 해가 지났을까. 어느 해인가 추석 즈음해서 고향을 방문하게 됐다. 부모님이 사시던 고향집에 들렀다가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됐다는 그 지역 박물관을 구경하러 갔다. 매표소에 들러 표를 사고 입장하려는데 안내하는 여성의 모습이 낯익었다. 눈을 작게 해서 보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친구였다. 초등학교 동창생.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지극히 상투적인 안부 몇 마디 앙상하게 나누고 돌아섰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다시 헤어졌다가는 영영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얼른 다시 되돌아가서 친구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서로 마주 보기를 몇 초쯤이나 했을까, 그러고 나서 친구는 그것이 내가 내민 화해의 의미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말없이 내 손을 잡아줬다. 잠깐이었지만 울고 있던 그 친구의 어린 시절이 눈가에 스쳤다. 해묵은 내 잘못에 대한 사과와 화해의 손을 친구는 알듯 말듯 무표정한 얼굴로 잡아주고는 다시 돌아섰다.

사실 그 친구를 처음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괴롭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자였더라면 오히려 마음의 짐이 없었을 텐데, 불행히도 나는 가해자였다. 이유는 그 친구 어머니와 내 아버지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해였지만, 나는 괜한 시기심으로 아버지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친구의 괴롭힘을 당해야 했으니 그 아이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나이가 이쯤 되고 보니 사실보다는 오해로 인해 생기는 일들이 더 많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모든 일이 저 혼자만 괴로운 듯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예쁜 막내딸이 아니었다. 서로 건네는 말수도 줄었고, 아버지를 피하는 버릇도 생긴 것 같다. 내가 머리를 깎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며 ‘내가 그동안 아버지께 잘못했구나’ 생각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때문에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팠다. 어쨌든 그날 내가 그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는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친구가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괴로웠던 지난 시간들과 나는 결코 화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름달처럼 마음도 풍요로운 한가위 명절이다. 따뜻한 고향을 다녀오는 시간이었을 테니, 이제는 화해할 때가 됐다. 남에게뿐만 아니라 힘들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도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줄 때가 됐다. 눈물이 나면 울어도 좋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실컷 울어라. 남에게 용서를 구하듯, 자신의 과거에도 그동안 미안했노라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자신에게도 위안이 필요하고, 또 그래야만 오랜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 한 번 불타버린 곳에 다시 불이 붙지 않듯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열고 스스로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매듭은 끊어지지도, 풀리지도 않는다. 삶의 모든 아픔은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비로소 어루만져지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 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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