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걸신 들리고, 귀신 씌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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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여름 더위에 똑 떨어진 입맛이 돌아오면서 식욕도 한층 왕성해지는 시기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배 속에 걸신이라도 들른 듯 먹어대는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 살이 찔까 부쩍 걱정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걸신(乞神)은 빌어먹는 귀신을 이르는 말로 ‘걸신이라도 들른 듯’이라고 표현해선 안 된다.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라고 해야 한다. 귀신이나 넋 따위가 덮치다는 뜻의 동사는 ‘들르다’가 아니라 ‘들리다’로 ‘들린, 들리어, 들리니, 들렸다’ 등과 같이 활용하는 게 바르다. “허기를 느낀 그는 걸신이 들린 듯 정신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처럼 써야 한다. ‘들르다’는 지나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는 의미의 동사로 ‘들른, 들러, 들르니, 들렀다’ 등과 같이 활용된다.

 걸신은 염치없이 지나치게 탐하는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한다. 한 단어로 ‘걸신들리다’고 하면 굶주려 음식을 탐하는 마음이 몹시 나다는 뜻이다. “살을 뺀다고 무조건 굶다가 스트레스 등을 받으면 걸신들린 듯 게걸스럽게 먹는 특징이 있다”와 같이 쓰인다.

 그러면 공포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귀신이 나타난다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폐가는 ‘귀신 쓰인 집’이라고 해야 할까, ‘귀신 씌인 집’이라고 해야 할까.

 둘 다 바른 표현이 아니다. ‘귀신 씐 집’으로 바루어야 한다. 귀신 따위에 접하게 되다는 뜻의 동사는 ‘씌다’로 ‘씐, 씌어, 씌니, 씌면, 씌었다’ 등과 같이 활용한다. “귀신 씌인 집이라며 동네 사람들조차 근처에 가기를 꺼렸다” “귀신이 쓰여 불행한 일이 생길 거라며 기도비 명목으로 수십억원을 받아 가로챈 무속인이 잡혔다”처럼 사용해선 안 된다. ‘귀신 씐 집’ ‘귀신이 씌어’로 고쳐야 맞다.

 “그런 실수를 하다니 아무래도 내가 뭔가에 씌었던 모양이야”와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다. ‘뭔가에 씌웠던 모양’이라거나 ‘뭔가에 쓰였던 모양’이라고 해선 안 된다. “무언가에 씐 듯 몰두하는 게 천재들이 가진 공통점이다”처럼 쓰인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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