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야구가 안될 땐 골프를 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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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이영상을 탔다고? 알았어, 나 지금 라운드 중이니까 일단 끊어."

메이저리그 현역 최고 투수 랜디 존슨(40.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지난해 11월 자신의 통산 다섯번째 사이영상 수상 소식을 듣고 했을 법한 말이다. 그는 페블비치 골프장 2번홀에서 휴대전화를 통해 수상 소식을 들었다.

존슨은 알아주는 골프광이다. 그는 야구장을 떠나면 골프장에서 산다. 골프를 즐기는 정도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로 산다. 그의 집은 잭 니클로스가 설계한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의 '데저트마운틴 클럽' 안에 있고 뒷마당에는 퍼팅 그린이 있다.

존슨은 데뷔 초창기 '야구장의 존 댈리'였다. 성격이 급했고, 투구 스타일도 그랬다. 시속 1백마일(1백61㎞)에 가까운 강속구로 타자를 윽박지르려 들기만 했다. 그래서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골프에 심취하면서 그는 '완성'됐다.

그는 최근 발간된 잡지 '스포츠 위클리'에서 "골프를 통해 강약 조절을 배웠다. 타자를 상대로 한 템포 죽이는 노하우를 얻었고, 호흡을 조절하며 나를 컨트롤했다"고 말했다. '힘과 감정의 조절'을 골프를 통해 얻은 존슨은 승승장구했다. 그는 1999년 이후 4년째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독차지하고 있다.

'투구에서의 멘탈리티'뿐만이 아니다. 타자의 경우 직접적인 기술 면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00년 내셔널리그 MVP 제프 켄트(휴스턴 애스트로스)는 골프를 통해 타격 슬럼프를 벗어난 경험이 있다. 그는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낀 다음날 아침 골프장에 갔다. 계속해서 슬라이스가 났다. 내 머리가 (어깨보다)먼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중을 하면서 공을 때려내는 순간에 시선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두 개의 안타를 때렸다"고 밝혔다.

지금은 고인이 된 투수 대럴 카일은 96년 12승11패, 방어율 4.19의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래리 디에커 감독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카일은 ▶힘과 기교의 조화 ▶세시간 정도의 정신 집중▶실수를 잊는 노하우 등을 골프를 통해 익혔다.

선발투수 카일에게 정신 집중력과 나쁜 결과를 잊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큰 도움이 됐다. 이듬해 카일은 19승7패, 방어율 2.57을 기록하며 사이영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골프가 가져다준 놀라운 변신이었다.

이 밖에도 18홀과 18이닝을 마쳐야 끝이 나고, 순서대로 쳐야 하는 등 경기의 기본 골격에서도 골프와 야구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처럼 장황하게 골프 예찬론을 펴는 것은 우리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 외에 특별한 취미가 없는 선수들에게 골프를 추천하고 싶어서다(물론 모두가 골프를 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자도 아직 골프를 쳐본 적이 없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비시즌이나 전지훈련 때는 물론 원정경기 때도 충분히 골프를 즐길 수 있다. 선동열(은퇴)이 일본에서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일 라운드가 있다면 최소한 정수근(두산)처럼 오전 3시까지 술 마시고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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