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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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홍사익 중장은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 3월9일에「필리핀」으로 가서 그 다음해 8·15까지 포로수용소장으로 있었는데 그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는 과연「전범」으로 체포되어 수많은 부하들이 포로를 학대한 죄과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해방 후 그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정계의 요인과 사회 유지들이 연명해서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구명 운동을 벌였는데 친일파라면 이를 갈아붙이던 당시의 이승만 박사까지도 그 진정서에 서명을 하였으니 그것은 홍사익 중장이 일본군의 육군 중장이기는 하나 민족적으로 얼마나 많은 기대와 촉망을 받고 있었던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서는 각하 되고 홍 중장은 필경「마닐라」에서 교수형이 되니 때는 1946년 9월26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가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우리 나라 국군을 창설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영친왕과 홍 중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기동씨는『비극의 장군 홍사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홍사익은 동경에서의 중대장 시절부터 당시 이왕으로 불리던 영친왕 이은씨와 사귀기 시작했다. 영친왕은 그보다 7세 아래였으나 육사에서는 3년 후배였고 육대는 오히려 선배였다. 1923년 11월 육 대를 졸업하고 난 후 동경에 있는 근위 사단의 우위보병 연대에서 중대장을 하고 있었다.
망국의 왕자로서 유달리 조국애에 불타 있던 그가 같은 동경시내에서 중대장을 하고 있는 동포 홍 대위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홍 대위가 육군대학에 입학하게되자 그는 더욱 관심을 갖고 사귀게 되었다. 영친왕은 그를 남달리 유능한 군인으로 보았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도 투철한 것을 알았던 것이다.
당시 영친왕은 내면적으로 고독한때였다. 오랫동안 그를 돌보아 주던 조동윤이 1923년에 죽었던 것이다. 조동윤은 구한말의 젊은 장군시절부터 동궁무관장의 자격으로 영친왕을 보좌해 왔었다. 그 공로로 한일합병이 될 때에 남작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20여 년을 성실하게 영친왕을 위해서 일해왔던 것이다.
홍사익으로 서는 이 망국의 고독한 왕자에게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도 망국의 유복자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곧 지기처럼 사귀게 되었다. 영친왕은 당시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진급도 빨랐고 참모본부 근무와 같은 최고의 보직을 받고 있었다. 그는 1927년 홍사익 보다도 먼저 소좌로 진급하였고 자기의 상급자인 두 사람의 대좌를 수행원으로 동반하고 구라파를 여행한 후 다음해 봄에 돌아왔다. 홍사익은 1930년 8월에는 소좌로 진급했으나 식민지 출신이라는「핸디캡」은 이때부터 따라다니기 시작하여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의 배경을 가진 육대 출신의 장교라면 육군성의 군무 국이나 참모본부의 제1부(일본에서는 작전참모부를 가리킨다) 에서 근무할 수 있었을 것이나 이것은 그로서 바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적어도 대대장의 자리는 주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자리도 주어지지 않았고 연대 부라는 한직으로 이리저리 옮겨졌다.
영친왕 자신은 대대장으로, 사단장과도 개인적으로는 술을 마실 수가 있는 형편이었으나 그를 후원하기에는 아직 계급과 관록이 모자랐다. 이러는 동안 1933년 봄에 홍사익은 뜻밖에 만주로 전출되었다. 일본의 대륙침략 음모가 태동되었던 이 시기에 그에게 내려진 전출 명령은 장춘(나중의 신경)에 자리잡고있는 관동군 사령부 부라는 것이었다. 1931년 가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 군이 만주 국을 만든 지 1주년이 되던 해였다!
홍사익 중장이 산하 봉문 대장 등 일본의 전범과 함께「마닐라」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1946변 1월이었는데 교수형이 집행된 것은 8개월 후였다. 구명의 진정서를 검토하느라고 시일이 걸린 모양인데 그는 기념으로「진인사·대천명」이라는 여섯 글자를 써 놓고는 조용히 사형대로 올라갔다고 한다.
영친왕은 홍 중장의 죽음을 마치 골육이 사형을 당한 듯이 몹시 슬퍼하였으나 1967년 9월26일 과거 일본 육군의 장성들이 동경에 모여서「홍사익 장군의 추도회」를 개최했을 때에는 영친왕은 불치의 병을 품은 채 환국하여 성모병원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누워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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