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현실주의 외교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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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무현 외교는 대통령 취임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북한 핵 문제로 국제사회의 관심이 한반도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북한 덕분에(?) 국내에 앉아 외국인사들을 많이 만났다.

또 특사들을 주변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우리 처지나 국가의 장래가 걸린 외교 과제들을 놓고 짧은 기간에 밀도있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비선택적 여건은 지도자 자신이나 나라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모두가 준비된 대통령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당선자의 외교수업 가운데 대통령의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대북정책이 대외정책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감각이어야 마땅하다.

남북관계가 민족공조만으론 풀어갈 수 없으며 주변국과 국제사회가 간여된 외교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이 노무현 외교의 출발이어야 한다. 외교수업을 마치고 실천의 세계로 진입하는 대통령에게 새 정부 외교의 기본 자세에 관해 몇마디 던진다.

우선 전임자의 햇볕정책을 대체할 대북정책의 새로운 이름찾기에 에너지 낭비할 필요 없다. 내가 아는 몇몇 국내외 인사들이 새 정부 측으로부터 작명 청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부질없는 노력이다. 대북정책은 포용원칙에 기초하면 그만이다.

대북정책의 방향을 규정하게 될 이름붙이기는 예측하기 힘든 북한을 상대하는 데 부담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국제사회의 불필요한 오해를 자초할 가능성도 있다. 대외정책 역시 선언적 구호에 집착하기보다 내실에 충실해야 한다.

둘째, 대통령의 참모들은 "盧대통령이 반미주의자가 아니며 통일 이후에도 미군의 주둔을 희망하고 있다"는 넋두리를 그만 했으면 싶다. 정작 미국인들은 이런 수사(修辭)에 크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盧대통령이 펼치는 정책을 보고 경험적으로 한국 지도자의 대외인식과 입장을 판단할 뿐이다. 또 통일 이후 주한미군의 필요성 여부는 기나긴 통일 여정의 모습에 따라 결정될 일이지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셋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5월께로 대충 합의를 보고 추진하는 모양이다. 방미 이전에 주요 안건에 대한 사전 조율을 끝내고 우리의 필요뿐 아니라 손님을 맞을 미국 측의 요청이 간절할 때 워싱턴을 찾는 편이 후유증이 적다.

다만 'ASEAN+3'이나 APEC정상회담 등 다자간 포럼에서 첫 상견례하기 이전에 이뤄지는 것은 타당하다. 양국 정상의 만남이 향후 5년간 한.미 관계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다는 행사의 엄중함을 이해한 뒤 성사돼야 한다.

아울러 1993년 말 김영삼-클린턴 회담이나 2년 전 김대중-부시의 어설픈 만남이 남긴 파장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넷째, 나는 오히려 盧대통령이 미국 방문에 앞서 일본을 찾기를 바란다.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한다고 해서 워싱턴이 반발하거나 유감스럽게 생각할 리 없다. 동아시아지역 미국의 두 동맹 간에 우호를 다짐하는 모습은 워싱턴이 반길 일이다.

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방문에서 천명한 '21세기를 향한 한.일 관계의 발전적 장래'를 다시 다짐하고 향후 정상 간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필요하면 만나겠다"는 '셔틀외교'를 선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새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할말은 하겠다는 자세를 환영한다. 하지만 정황에 대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 없이 대드는 식의 반응은 득보다 실이 많다.

더욱이 미국이 서운하다고 중국에 기우는 듯한 발언이나 신경질적인 외교행보는 한국 외교의 현실감각에 빈틈을 드러내는 자해행위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프래그머티스트임을 자처한 盧대통령의 현실주의 외교를 주목한다.

길정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