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내를 밟는 남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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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30면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가족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죄책감이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과 즐거움도 죄의식을 불러온다. 아내가 관절류머티즘을 앓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웃다가도, 걸그룹의 다리를 보며 감탄하다가도 문득 죄를 짓는 심정이 된다. 그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가령 퇴근 후 직장동료와 맥주라도 한잔 마신다고 하자. 그날은 무더운 날씨에 습도도 높고 오후엔 외근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맥주 한잔 마시는 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죄의식을 느낀다. 집에는 아픈 아내가 혼자 끙끙 앓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마시는 차가운 맥주는 아내의 피요, 기름진 안주는 아내의 살이다. 남편은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옳지만 술자리 내내 죄의식을 견디는 쪽을 택한다.

죄책감은 집에 가까워질수록 커지고 무거워진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남편의 죄책감을 아내의 퉁퉁 부은 다리가 맞이한다. “오늘 더운데 외근하느라 많이 힘들었나 봐요.” 이럴 때 남편은 아내의 다리를 붙들고 참회의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렇다고 정말 우는 것은 아니고 단지 심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하철 광고 실사 다녔는데 땀으로 샤워했지 뭐.”

아내는 웃는 얼굴이 예쁘지만 아픈 후로 웃음이 줄어들었다. 옷 입는 스타일도 달라졌다. 원래도 요란한 옷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내는 밝고 화려한 옷은 입지 않는다. 치마도 입지 않는다. 관절이 부은 다리를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내의 몸을 이처럼 망가뜨린 사람은 남편이다. 그러니 아내의 아픈 몸을 위해 남편은 뭐라도 해야 한다. 하는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아내를 마사지해 주는 것 말고.

처음에 남편은 아내를 손으로 마사지했지만 너무 힘들어 곧 발로 바꾸었다. 발로 하는 마사지는 힘은 적게 들면서 효과는 컸다. 발 마사지도 처음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힘 조절이 어려웠다. 살살 누르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그렇다고 힘을 주어 밟다 보면 아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또 다리 부위별로 밟는 강도를 다르게 해야 하는데 그것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새 실력이 붙고 요령을 터득하게 되는 것일까? 남편 스스로 생각해도 발 마사지 실력이 제법이다. 힘 조절을 잘하게 된 것이다. 눈을 감은 채 체중계 위에 발을 얹고 눈금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 것 같다. 발바닥에도 여러 부위가 있는데 그 부위의 특징을 이용해 누르면 환자의 만족은 커진다. 처음엔 발볼과 발뒤꿈치 사이에 움푹 파인 곳을 주로 사용했다면 요즘은 발볼, 발뒤꿈치, 발가락 등을 자유자재로 적재적소에 사용한다. 엎드려 누운 아내의 흡족해하는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남편은 아내가 꽤 만족해한다는 것을 안다. 발 마사지를 하다 보면 어느새 아내가 스르르 잠이 들기 때문이다. 통증 때문에 잠을 통 이루지 못하던 아내가 말이다.

발 마사지에는 한 가지 심각한 부작용이 있다. 아내의 다리가 점점 예뻐지는 것이다. 종아리와 발목이 걸그룹의 그것보다 더 예뻐졌다. 자신의 다리가 예뻐졌다는 것을 아내도 아는 것일까? 바지만 고집하던 아내가 치마를, 그것도 점점 짧은 치마를 찾기 시작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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