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봄비가 내리는 소리|박목월<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0일은 흠 통을 울리는 빗물소리에 잠을 깼다. 잠을 깼어도 한참 어리둥절했다. 콸콸콸 울려오는 빗물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설었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누운 채로 귀를 기울였다. 참으로 맑고 투명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그것은 평생에 처음 듣는 것처럼 싱싱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다. 저 울림 하나 하나, 물줄기 한 가닥마다 봄이 살아나고, 새로운 생명이 눈을 뜨는 것만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날이 우수절. 비도 올만한 계절로 접어든 것이다. .
「커튼」을 젖히자 건너편 수녀원의 마른나무들이 새벽의 정적 속에서 숙연히 비에 젖고 있었다. 그것은 시적인 환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도를 드리는 수녀들보다 더욱 정숙한, 모습이었다.
빗물에 씻기는 그 나무들은 이미 봄의 피부를 드려내 보이고 있었다. 앙상하게 검은 줄기마다 서리는 윤기. 한 겨울을 참고 견뎌온 그 내부로 생명의 물줄기가 뻗쳐오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초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우로-.
그 은혜의 단비는 온 누리에 존재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베풀어지는 절대의 은혜이다. 참으로 살고있는 모든 것은 위를 향하여 목마른 입을 벌리고,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하늘이 내려 주시는 것으로. 그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비가 개자 완연히 봄기운이 살아 나는 것 같았다.「문도춘환 미상식, 주방한매 방소식」- 이백의 시에서처럼 매화 옆으로 찾아가 봄소식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잔디의, 빛깔이 달라지고, 흙빛이 변한 것으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밤에는 대보름의 밝은 달. 대보름의 달을 보고 빌면 무엇이나 소원 성취한다고 어린 날에 들었다.
그렇다면 70년대의 첫 봄에 단비로 신심을 맑게 하고, 거울보다 맑은 달을 우러러보며, 우리는 내일을 다짐해 볼만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