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금 약탈 행위 도왔다" 영국 중앙은행, 양심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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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국 중앙은행(BOE)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한테서 약탈한 금을 이체하고 매각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영 중앙은행은 영국 정부의 동의도 없이 자체 판단으로 일을 처리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인터넷에 공개된 영 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나치는 1939년 3월 체코를 침공해 점령한 뒤 체코 중앙은행이 보유한, 당시 가치 560만 파운드(약 96억원)어치의 금을 약탈했다. 앞서 체코 정부는 나치의 침공 위협이 거세지자 보유하던 금을 ‘중앙은행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국제결제은행(BIS)에 예치했었다. 당시 체코가 나치 독일 치하로 넘어가면서 영국 정부는 영국 내 체코 자산을 동결했다. BOE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나치의 금 매각 조력 행위는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계속됐다.

BOE는 이에 대해 BIS와의 업무 협력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체코 점령 뒤 나치의 독일 제국은행은 영 중앙은행의 도움을 받아 BIS에 예치된 체코의 금 400만 파운드어치를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이체하고, 나머지 160만 파운드어치를 런던에서 매각했다.

 나치가 체코에서 약탈한 금을 처리하는 데 영국과 스위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해 온 네빌 와일리 영 노팅엄대 역사학 교수는 “영 중앙은행은 런던을 국제 금융 중심지로 유지하고, 파운드화의 국제 결제통화 지위를 지키는 데 지나치게 매달리다가 나치의 금융 거래를 묵인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영 재무장관 존 사이먼은 영 중앙은행의 몬태규 노먼 총재에게 영 중앙은행이 체코의 금을 보유하고 있는지 질의했다. 이에 대해 노먼은 영 중앙은행이 체코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영 중앙은행은 때로 BIS를 위해 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금이 BIS 자산인지, 아니면 다른 고객의 소유인지는 모른다”고 변명했다. 이후에도 영 중앙은행은 나치의 금 44만 파운드어치와 42만 파운드어치를 뉴욕으로 이체하는 걸 도왔다.

 영 중앙은행의 어두운 과거는 50년 처음 기록됐으며 이후 63년 만인 지난달 30일 이 은행의 자료를 디지털화하면서 처음 공개됐다. 영 중앙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이뤄졌던 체코의 금 관련 사건은 아직도 뼈아픈 과거로 남아 있다”며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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