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북한 핵문제, 명답과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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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창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북한이 제의한 북·미 고위급회담을 한국과 미국이 일소에 부치는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북한과 대화를 위한 대화는 북한이 핵무기를 더 고도화하는 데 시간만 벌어줄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북한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동안 북한은 핵협상에서 합의→보상→도발→합의를 반복해 오면서 핵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왔다. 보수건 진보건 모두 인정하는 대목이다. 한·미의 대응에 일리가 있는 배경이다.

 여기서 통일부 전직 고위관료가 최근 필자에게 해준 “통일이나 북핵 문제에는 명답이 있을 수 있으나 정답은 없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맞는 말이다. 통일이나 북핵 문제에 전 세계적으로 날고 긴다는 엘리트 관료와 교수들이 개입했지만 그 결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6년 2월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북한 지도부의 붕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고 의회에서 증언했다. 다른 국내외 전문가들도 여기에 동조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아직까지 건재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1992년 ‘남북한이 늦어도 2000년도에는 확실하게 통일된다’는 취지의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필자도 지금 볼 때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런 현상은 북한이 워낙 예측불허의 독특한 체제라는 점에 기인한다. 수많은 주민이 굶어 죽어도 시위 한 번 없는 체제, 지도자가 사망했다고 울부짖는 주민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태다. ‘신정(神政)체제’니 ‘유격대 국가’니 하는 여러 개념규정이 있지만, 이것들을 다 합쳐도 깔끔하게 해명이 안 되는 체제가 바로 북한체제다. 이런 북한에 대한 서방세계의 인식과 해법이 다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죽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에서 함께 일했던 고위관료들조차 지금은 해법이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한 사람은 “북한의 핵 보유로 북·미 수교, 북·일 수교, 정전협정의 평화협정화 등을 통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라는 개념은 그 실효성과 타당성을 잃었다”며 “통일이 핵문제 해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대북 압박을 강화해 북한 체제의 붕괴를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대북 포용정책이 모든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북한체제의 본질상 대북 강경책으로는 우리가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역설한다. 북한의 핵 능력이 더 향상되기 전에 ‘북한체제 보장=핵문제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북·미 고위급회담에 대한 현 한·미의 대응이 ‘정답’이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단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길 바란다. 북·미 간에 실무접촉이 벌어지고, 남북 간에도 당국회담이 개최돼 핵문제를 푸는 ‘선순환’이 가동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북한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비책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안 된다’는 얘기만 임기 내내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북한 주장을 무조건 들어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북한이 북·미 고위급 회담을 제안한 국방위원회 중대담화의 내용은 모순과 조잡함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에 대해 욕설을 써도 그냥 넘어갈 것이라는 과거의 타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을 좀 더 압박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북한이 ‘도발’에서 ‘대화’로 선회한 이상,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전략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대화를 통한 북핵문제 해결을 원한다’는 시진핑 중국주석의 말을 전했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중국의 기본적인 시각을 박 대통령에게 환기시킨 것이 아닐까. 박 대통령도 “북한이 그냥 변하지 않으면 그렇다고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관되게 국제사회와 공조해서 북한이 변화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방법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북한이 철통같은 가드(guard)를 내리고 대화의 장에 들어올 수 있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한국이 맡아 미·중을 설득하는 구조가 돼야 ‘정답’으로 가는 길이 뚫릴 것이다. 그리고 그 등대는 1972년 보수주의자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 결정 같은 담대한 전략을 개발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동될 것이다.

안희창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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