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왜 선악과 나무를 심었냐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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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27면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 때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을 세웠다. 그곳에 두 나무를 심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 지식의 나무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중에서 선악 지식의 나무만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뱀이 등장하고 사람을 유혹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하와가 먼저 선악 지식의 나무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워먹게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는 신화 같다. 종종 희화화되기도 한다. 아울러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뱀이 어떻게 말을 해? 왜 나무에 선악과라는 이름을 붙였지? 무슨 과일일까? 사과는 아닐까? 먹지 말라고 하지 말고 아예 먹지 못하도록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과일 하나 따먹었다고 낙원에서 쫓아내는 건 너무 심한 벌이 아닐까?”

왜 나무 이름이 선악 지식의 나무일까. 이것이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나게 됐을까. 우리 모두에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선이고 내가 원치 않는 건 악이라고 말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걸 인간의 자유라고,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본권을 거부당할 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해서 반발하기도 한다. 단지 하나님뿐 아니라 선악을 구분해 온 지금까지의 전통을 거부하고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조차도 부정한다.

나는 묻는다. 이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진정한 자유인가. 그렇게 될 때 나는 진정 행복할 것인가. 그리고 세상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돌아갈 것인가. 창세기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 갈등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는 땅도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도덕 공백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선악의 전통적인 기준이 무너져 버렸지만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대신 이기주의라는 비도덕적 풍조가 넘쳐난다. 법을 통해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시도해 보지만,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선악과가 먹지 못할 열매라면 먹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를 만들면 되지”라고 반문하는 건 인간 스스로 존귀함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디서 도움을 구할 것인가. 종교가 나서야 한다. 종교의 근본은 하나님에게 근거한 도덕적 전통을 통해 생명을 회복하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선악 지식의 나무는 생명과 세상을 살리는 거룩한 은총의 나무다. 성경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기준이 신성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그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얘기는 인간의 인간됨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과 악을 선택하기를 원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존귀함을 지켜주고자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스스로 존귀함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악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일러 준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기적 성향은 단순히 청소년기의 미발달된 인격 정도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로 다뤄야 한다. 단순히 법적인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 점에서 선악 지식의 나무는 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인격적 배려다.



박원호 장신대 교수와 미국 디트로이트 한인 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등을 지냈다. 현재 ‘건물 없는 교회’로 유명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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