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워치] 발톱 세운 '비둘기' 파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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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5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연설은 평소 안보리에서 볼 수 있었던 연설과 달랐다.

장장 90분 동안 비디오.슬라이드.감청 테이프 등 멀티 미디어가 총동원돼 흡사 기업설명회 같았다.

미국 언론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애들레이 스티븐슨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같은 장소에서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한 사실을 공박한 이래 가장 중요한 연설이었다고 보도했다.

파월은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의 활동을 방해.기만함으로써 대량살상무기(WMD)개발과 관련된 물질.시설에 대해 완전.정확한 신고를 하도록 한 안보리 결의 제1441호를 '중대하게'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라크는 생화학무기를 제조.은닉했으며, 테러단체 알 카에다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함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그동안 저질러온 만행을 제시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후세인의 제거를 위한 무력 행동을 안보리가 승인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러시아.중국 등 무력 행동에 반대하는 나라들은 이라크가 WMD를 보유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무기사찰단 규모를 확대하고 사찰기간을 늘리는 등 평화적 방법을 통한 사태 해결을 고집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부득이하면 안보리 결의 없이 독자적으로 군사 작전에 나설 수도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오는 14일 있을 유엔 사찰단의 제2차 보고가 사태 전개의 중요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파월의 태도 변화다. 파월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 대표적 비둘기파였다. 다자간 협조를 통한 외교적 사태 해결을 강조하고 무력 사용에 신중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매파로부터 '싸우기 싫어하는 전사'라는 비난을 들어왔다.

그러나 최근 부시 행정부의 가장 강력한 전쟁 지지론자로 변신했다. 지난달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매파의 주장을 펴더니, 지난 3일자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우리는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유럽 언론은 파월이 이처럼 돌변한 이유를 부시 행정부 안에서 고립무원의 처지,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국가들로부터 자신의 '인내 외교'가 무시당한 데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미니크 드 빌르팽 프랑스 외무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이라크에 대한 그 어떤 무력 행동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크게 당황하고 개인적으로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유럽 국가 외교관들은 부시 행정부 내의 유일한 아군이었던 파월의 갑작스러운 변신에 실망하고 있다.

파월의 자서전 '나의 미국 여행'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 가운데 다수는 앞으로 미국 국민이 이해하지 못하는 설익은 이유에서 시작된, 마음 내키지 않는 전쟁에 묵묵히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면서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의 사활적 국가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사용돼야 하며, 일단 사용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이것이 바로 '파월 독트린'이다. 그러면 이라크 공격은 미국의 사활적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가? 파월 독트린은 아직도 유효한가? 비둘기에서 매로 변한 파월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chuw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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