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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와 '고령화 T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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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신혼여행지에 (남자가) 여자친구를 데려가고 (남자의) 아내와 어머니는 그 여자친구를 카페로 불러내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남자는 갓 결혼한 아내에게 ‘난 여자친구를 더 사랑한다’고 소리를 지른다. 대한민국 드라마 너무 재미있다. 뭐 하러 (영화인들은) 시나리오를 1년이나 붙잡고 있는 건가. 난 반성해야 한다.” 지난해 1200여 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의 제작자가 얼마 전 트위터에 남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MBC 주말연속극 ‘금 나와라, 뚝딱!’ 얘기다. 물론 ‘너무 재미있다’거나 ‘반성해야 한다’는 표현은 반어법이니 오해 없길 바란다.

 상업영화를 만드는 한국 영화인들에겐 소위 ‘막장 드라마’의 생산과 유통 과정은 ‘연구 대상’이다. 이들이 신기해 하는 건 품질이 명백히 낮은데도 별다른 자체 검증 없이 방영되는 점, 그런 데 비해 작가들의 권한은 세고 원고료가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다. 말도 안 되는 전개와 바로 다음이 예상되는 뻔한 설정 등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도 시청률만 높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방송가의 불문율 덕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에게 지출되는 과도한 비용은 드라마가 성공해도 제작사는 별 이익을 보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를 수년째 지속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준거가 되는 시청률엔 문제가 없을까. 시대 변화상을 감안하면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최근 학계와 방송계에서 시청률 조사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 배경은 ‘고령화 TV’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TV 시청층은 급속히 고령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출생의 비밀, 불륜과 배신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저품질 막장 드라마가 ‘융성’하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시점이다. 막장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남녀 불문 60대, 다음이 50대다. 이 시청층은 TV를 가장 많이 시청하는 집단과도 겹친다. 시청률 조사회사인 TNmS에 따르면 지난해 남자 60세 이상이 가장 TV를 많이 봤고(5시간37분) 다음은 여자 60세 이상(5시간26분)이었다. 20대 남자가 하루 1시간32분 보는 데 비하면 엄청난 차이다. 막장 드라마의 편성 비율과 견주어보면 이들은 하루 TV 시청 시간의 절반 가까이 막장 드라마를 보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률엔 DMB나 IPTV, 스마트폰 앱 등 TV 외의 매체로 빠져나간 젊은 세대의 시청 행태는 반영되지 않는다. 즉 질 낮은 막장 드라마가 절대강자로 군림하는 유일한 근거는 시청률이지만, 이것은 특정 연령층의 선호도만을 나타내는 협소한 수치라는 얘기다. 말 나온 김에 노년층이 막장 드라마를 즐겨 소비한다는 통념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양질의 콘텐트가 있는데도 막장 드라마를 찾는지, 아니면 이 연령층이 즐겨 보는 시간대엔 그것 말고는 볼 게 없어서인지 따져보자는 얘기다. 한때 ‘드라마 한류’를 일으켰던 나라에서 노년층의 주된 여가 상품이 기껏해야 막장 드라마란 건 좀 창피하지 않은가.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