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 2235억 對北 비밀지원 '코리아 브랜드' 먹칠

중앙일보

입력

미국계 A증권사의 한 임원은 최근 만난 외국인 주식투자자에게서 쓴 소리를 들었다. "위환위기 이후 개혁을 통해 한국기업들의 의사결정 과정이 투명해졌고, 정경유착도 옛날 얘기가 됐다고 생각했으나 현대상선 사태로 이런 믿음이 깨졌다"는 것이다.

유럽계 주한 상공회의소의 한 임원은 "현대상선이 대북(對北) 비밀자금을 제공했다는 소식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선진국의 기업 풍토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전했다.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산업은행에서 빌린 돈 4천억원 중 2천2백35억원을 북한에 비밀리에 송금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한국기업과 증시에 대한 외국인들의 신뢰에 흠집이 나고 있다.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과 접촉한 증권사 및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들은 "한국정부가 자랑하던 개혁의 성과물이 이런 것이었느냐"며 실망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투자할 때 기업 운영의 투명성을 꼼꼼히 따진다. 회사 돈이 주주이익을 위해 쓰이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대상선은 주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거액의 대출금을 불분명한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계 B증권사 사장은 "현대상선이 회사자금을 사금고처럼 이용한 것을 보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기업들의 의사결정 과정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견제장치가 약한 '1인 경영체제'가 빚을 수 있는 문제점이 확인됐다며 한국의 다른 기업들도 지배구조에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우려한다는 것이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들은 "현대상선 사태가 몇 달 전부터 불거졌던 만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증시에 반영된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 기업 전반에 대한 투명성 의혹으로 번질 경우엔, 한국기업들의 가치를 동급의 외국기업 가치보다 낮게 평가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현상이 심화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북한핵 문제로 투자심리가 가라앉은 가운데 북한과 관련된 현대상선 문제가 터져 나오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에선 언제든지 돌발적인 악재가 튀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비밀자금 지원이 사실로 밝혀진 만큼 이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은 마무리에 쏠려 있다"며 "정치적 타협으로 끝날지, 아니면 법적 책임을 물을지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외국인들은 과거 대규모 정부 입찰 등이 투명하게 처리되지 않았던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며 "현대상선 문제도 명확하게 책임을 가려내지 않으면 한국기업이나 경제 전체에 대한 투명성 의혹으로 확대되고 결국은 외국인 직접투자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AWSJ)은 5일자 '김대중의 속임수(charade)'제목의 사설에서 현대상선의 대북 지원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이번 스캔들의 정치적 해결은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꼬집었다.
김준술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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