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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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망년회란 것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내 개인의 경우로 말한다면, 스물 네댓부터 직장생활을 해왔고 그 때부터 해마다 연말이 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망년회란 것을 해 왔으니, 생각하면 그 동안에 서른 네댓 번이나 망년회를 지내온 셈이 된다.
나이 젊었을 때에는 망년회에 대해서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저 섣달 그믐께가 되어 한해를 또 보내게 되는데 상여금도 타고 했으니 핑계거리로 떠들어대면서 술을 마신다는 것으로쯤 생각하여 왔다. 그것은 흡사 어렸을 적에 묵은세배라고 해서 섣달 그믐날 일가 집으로 절하고 돌아다니면서 돈을 얻고 좋아라고 떠들던 그런 기분과 같았다.
그러던 것이 나이 50이 지나고 보니 차차 망년회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다. 망년회 자리에서 드는 술맛이 젊었을 때에는 즐겁기만 하더니, 이제 와서는 몹시 써졌다. 이 한해도 또 아무 것 한 것 없이 허송세월로 보냈구나 하는 회한의 구슬픈 생각이 술 맛을 쓰게 만든 것이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취생 몽생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초조한 생각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게 하기 때문이다.
「찰즈·램」이란 영국 수필가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시간이 가지 말고 그대로 서 있기를, 모든 것이 변하지 말고 더 늙지도 말고, 더 좋아지지도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원하였다지만, 어쨌든 근래에 와서 망년회 소리를 들으면 어딘지 초조해지고, 불안을 느끼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만이 유난스럽게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일까 하고 일전 어느 망년회 자리에서 나보다 나이 십 년이나 틀리는 늙은 선배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껄껄 웃으면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직도 젊은 증거라는 것이다. 자기도 쉰 대여섯 때에 그런 것을 느껴왔는데 지금 일흔이 가까워지니까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이 다 없어지고 그만 체념이 되었는지 담담한 심경으로 아무 번민도 초조도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망년회를 생각하기를, 한해동안 지낸 일을 모두 잊어버리자는 술자리로 생각하지 않고 숫제 나이를 잊어버리자는 그런 망년회로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나이를 잊어버리자는 망년회-나도 이제부터 망년회를 그렇게 생각하여 볼까. 조용만 <고대영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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