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탐험 - 신체적 핸디캡을 이겨낸 그린버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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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야구 역사에서 행크 그린버그는 미국인들에게 뛰어난 야구스타 이전에 진정한 영웅으로 인식된다. 얼마전에는 "The Life and Times of Hank Greenberg(행크 그린버그의 삶과 시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큰 호평을 받기도 할 정도였다.

그린버그는 1930년부터 47년까지 18년 13시즌 동안(31-32년은 마이너리그, 42-44년은 2차대전 참전) 통산타율 .313에 331홈런, 그리고 두번의 MVP, 4차례의 홈런왕와 타점왕을 차지하였고, 5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한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야구선수 중 한명이었다. 특히 1938년에 세운 한시즌 홈런 기록인 58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팀 최고 기록이자 역대 10위에 해당되는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야구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최초의 유태인출신 메이저리거로서 2차대전을 전후로 크나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던 미국내 수많은 유태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특히 2차 대전때 육군에 징집되었던 그린버그가 30살 때인 1941년 징집만기 연령이 되어 제대를 한 이틀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다시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로 돌아간 일화는 이후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린버그가 신체적 불리함을 딛고 야구선수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체적 발달이 유난히 두드러졌다.

그의 발육이 얼마나 빨랐던지 그가 13살 때 이미 그의 키가 190cm나 되었고, 16살 때 그의 몸무게는 무려 91kg나 나갈 정도였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키가 192cm, 체중이 97kg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성장이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던 가를 잘 알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신체적 성장은 그에게 큰 핸디캡이 되었다. 무엇보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큰 체격은 그의 순발력을 떨어드릴 수 밖에 없었다. 빨리 달릴 수도 없었고, 동작은 부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덩치만 클 뿐이었다. 그가 어릴적부터 1루수만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운동선수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독한 평발이었다는 것. 평발이라는 핸디캡은 스포츠의 가장 기본인 러닝조차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평발이었던지 조금만 오래 달리기를 하게 되면 발전체에 통물집이 잡힐 정도였다. 그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운동선수로서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스포츠에 대한 열정으로 메워갔다. 그는 팀연습시간 이외에 주변의 야구장에서 개인 훈련에 몰두했다. 하루종일 훈련 파트너의 펑고를 받는가 하면 번트수비를 하기 위해 내야 그라운드를 뒹굴어야 했다.

또한 그린버그는 타격 연습을 위해 동네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그들이 던지는 공을 치는 훈련을 했다. 그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던지는 볼들을 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노력은 그가 어떤 코스의 공이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쳐낼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키는데 충분했다.

그런 개인훈련을 하는 버릇은 그가 프로에 입단하게 되면서도 계속 이어졌고 결국 그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가 되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신체적 성장은 엄청난 훈련과 노력의 덕분으로 오히려 프로에서 장타를 이끌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프로에서 '해머린 행크(Hammerin Hank)'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린버그는 1956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신체적 핸디캡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그린버그의 예는 신체적 조건이 선수의 기량에 결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석무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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