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만 있어도 그저 고마운 그대들은 ‘전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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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호 21면

“올해 록 페스티벌은 조용필을 헤드라이너(라인업 중 간판 뮤지션)로 세워라.” “저스틴 비버가 부르면 딱 맞을 노랜데…환갑 넘은 게 맞나요.”

컬처#: 조용필 19집 음반과 강우석 19번째 영화

23일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16일 공개된 가왕(歌王) 조용필(63)의 신곡 ‘바운스(Bounce)’에 쏟아지는 반응이 후끈하다. 8개 음원 차트를 ‘올킬’했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 봐 겁나”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bounce bounce’가 되풀이되는 구절에선 여느 걸그룹들의 후크송 저리 가라 할 묘한 흡인력이 느껴진다.

‘바운스’를 음원 사이트에서 다운로드받으면서 불현듯 함께 듣고 싶어졌던 노래가 있었다. ‘고추잠자리’다. 1981년 발표한 4집 수록곡. 라디오 인기순위 24주 연속 1위를 한 이 불후의 명곡 이후에도 그는 ‘못찾겠다 꾀꼬리’ ‘허공’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꿈’ 등 숱한 히트곡을 냈다. 하지만 ‘고추잠자리’를 낼 무렵이 조용필의 전성시대였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잠깐,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32년 전 이미 절정을 맛봤던 가수의 따끈따끈한 신곡을 듣고 있는 거다. 히트곡이 마지막으로 나온 게 90년대 초반 무렵이니 아무리 짧게 잡아도 그는 20년 전 가수다.

그런 이유로 사방에서 63세 노장의 파격과 혁신, 심지어 ‘회춘’을 찬양한다. 동의한다. ‘바운스’는 편곡이나 연주, 가사 등이 익숙하면서도 올드하지 않아 좋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전설은, 그저 지금까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4월 13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조용필 팬미팅 기사에 인용된 그의 한마디가 문득 떠올랐다. 새 음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앨범은, 그냥 하나 내는 거야.” 심드렁한 듯하면서 진심을 담는 특유의 화법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쏠린 지나친 기대와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말로도 내겐 들렸다. 그냥 하나 내는 음반에도 거장다운 새로움과 변화가 깃들길 요구하는 대중의 가혹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조용필이 새로워지려고 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존경스럽다. 최근 19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을 연출한 강우석(53) 감독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조용필이 한국 대중음악계의 전설이라면 강우석은 한국 영화계의 전설이다. 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로 데뷔해 올해 ‘전설의 주먹’에 이르기까지 동원한 관객 수가 3800여만 명. 이처럼 오랜 세월을 줄기차게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길고 굵게’ 활동해 온 감독은 없다. 게다가 제작과 투자를 병행하며 충무로를 이끌어 온 파워맨으로서의 존재감은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그에겐 이름값에 따르는 중압감이 컸던 모양이다. ‘이끼’에 이어 ‘전설의 주먹’까지, 젊은 감독들도 버거워하는 웹툰을 영화화하는 데 유독 관심을 가진 것도 시대에 뒤져선 안 된다는 강박이 작용한 걸로 보인다. 최근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그는 “3년 전 ‘이끼’를 찍을 때 아침엔 두통약, 저녁엔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다음 작품인 ‘글러브’를 만들 때는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전설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 전설’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흥행이 예상보다 불붙지 않고 있는 ‘전설의 주먹’을 보면 그런 중압감에 눌린 나머지 스텝이 살짝 엉킨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전설의 숙명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전성기 때의 자신과 비교 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필은 무슨 노래를 내놔도 ‘고추잠자리’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강우석은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공공의 적’ ‘실미도’ ‘투캅스’ 때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그들이 계속 뭔가를 보여주길 바란다. 꼭 새로워지지 않더라도 좋다. 20번째 영화를 만들 땐 강우석 감독이 이렇게 말하는 쿨한 모습을 기대한다. “이번 영화, 그냥 한 번 만들어본 겁니다.” 한때의 전설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음을 아는 것. 그래서 흐뭇한 것. 그게 전설의 존재 의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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