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4월의 크리스마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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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30면

4월 어느 날이었다. 전날 밤에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딸이 다리에 매달린다. “회사 가지 마. 나랑 같이 놀아요.” 딸은 아프다. 전에도 가끔 이런 적이 있었지만 요즘은 어리광이 더 심해졌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딸 옆에 앉는다. “그럴까? 연차 내고 하루 쉬어야겠네.” 아파트 입구에 핀 생강나무 꽃처럼 딸이 웃는다. “정말?” “그래. 이참에 아예 회사 그만두고 계속 놀지 뭐. 월급을 못 받으면 어때? 밥을 못 먹어도 옷을 못 입어도 돈이 하나도 없어도 물건을 살 수 없어도 이렇게 같이 놀면 좋잖아.” 그제야 내 속셈을 알아차린 딸이 눈을 흘기며 나를 잡은 손을 놓는다. 아파트 앞 화단의 생강나무는 밤새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아픈 딸을 두고 출근하는 마음이 꽃잎 진 나뭇가지 같다.

오전 회의 중에 문자 메시지가 온다. 어머니다. “몸은 괜찮은가요? 아침 굶지 말고 챙겨 먹어요.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사랑해.” 어머니의 문자는 마치 손으로 직접 종이에 쓴 편지 같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키려 한다. 어머니는 아프다. 아픈 어머니는 늘 멀쩡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다. 환절기인데 천식은 심하지 않은지, 황사가 온다던데 마스크는 갖고 다니는지. 어머니의 일은 종일 자식을 근심하는 일이다. 근심을 끓이느라 어머니는 늘 속이 편치 않다. 소화가 잘 안 되어 아침을 제대로 못 먹는 어머니는 밥이든 죽이든 빵과 커피든 꼬박꼬박 챙겨 먹는 아들의 아침을 염려한다. 나는 퉁명스러운 답 문자를 보낸다. “지금 회의 중입니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퇴근 무렵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오늘 우리 만나요. 사무실 앞으로 갈게요. 얼굴이 야윈 여자친구는 나를 보자 환하게 웃는다. 내 손을 잡는다. 이 사람은 내 사람입니다라는 듯. 여자친구는 걸을 때 조금씩 절룩거린다. 나 예뻐요? 응, 예쁘네. 거짓말. 화장도 안 했는데. 화장 안 해도 예뻐. 강남에는 정말 예쁜 여자들이 많네요. 다 성형수술한 얼굴들인걸. 예쁘면 그만이죠. 나도 수술해요? 뭐 나보고 수술비 내달라고만 안 하면야. 계단을 오르내릴 때 여자친구는 내 손을 더 꼭 쥔다. 나 모자 하나 사 줘요. 직접 골라주면 좋겠는데. 그럴까? 여자친구는 요즘 들어 부쩍 머리가 자꾸 빠진다며 모자를 이리저리 써 본다. 예뻐요? 잘 어울리네. 나도 맘에 들어요. 늦은 저녁 겸해서 우리는 막걸리와 전을 파는 식당으로 간다. 아프기 전에는 그도 술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안 마신다. 그래도 분위기는 내야 한다며 술 한 잔을 받는다. 여자친구는 기분이 좋은지 모자를 쓴 채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나 예뻐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아뇨, 난 거짓말이 좋아요. 여자친구는 생강나무 꽃처럼 웃는다.

밤중에 잠깐 잠을 깼다.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아내는 통증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내는 발목 부위를 손으로 탁탁 때리는 중이다. “왜 아파서 그래?” “괜찮아. 피곤할 텐데 들어가 자요.” 나는 아내 발목을 주무른다. 언제부터였는지 베란다 창 밖에는 눈발이 날린다. 아내가 생강나무 꽃처럼 웃는다. 그러니까 딸이자, 어머니이자, 여자친구인 아내가.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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