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찾아가는 교민들 "미국인으로 살되 뿌리 잊지 않을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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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때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잊고 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한국이 고국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는 한인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는 결국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분위기로 변했다는 것이 미주 동포들의 말이다.

하버드대 의대를 졸업하고 신시내티의 한 병원에서 소아과 전문의로 일하는 한인 2세 A씨(34)의 경우 정체성 때문에 고민에 빠진 좋은 사례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국말은 전혀 사용하지도 않았고, 한국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어차피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니 너는 한국과 관련된 것은 아예 모르는 게 낫다"면서 '뿌리 자르기'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A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의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백인들은 나를 자기들과 똑같은 백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A씨는 "처음엔 피부 색깔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일 뿐이며 백인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뒤부터 후배와 친지들에게 "아이들에게 반드시 한국어 교육을 시키고 한인들과의 인간관계도 다져놓으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인 신세대들은 상대적으로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11월 25일 LA 중심가인 월셔가(街)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인 1.5세와 2세 대학생 다섯명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미국인으로 살아가겠지만 결혼하면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을 방문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중 미국에서 태어난 제시카 박(22.여.남가주대)씨는 "내가 아무리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도 백인들은 나를 똑같은 백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서 "나는 코리안 아메리칸일 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윤정호(24.캘리포니아 노스리지대)씨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란 무조건 한국을 지향하는 자부심은 아니다"면서 "하지만 우리의 배경은 한국이며 한국의 문화.언어.역사를 빼고 우리를 다른 미국인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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