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대학 동기들이 연구소를 방문해 주었다. 졸업한 해가 1981년이었으니까 33년 만의 만남이었다. 간신히 알아본 그들의 얼굴들에서는 이공계(기계설계학과) 전공자로 산업 일선과 대학에서 우직하게 살아온 ‘베테랑’의 면모가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딴 길을 가서 공인이 된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주었지만, 나는 그들이 마냥 자랑스러웠다. 왜? 그들은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초고속 경제성장에 기여한 1등 공신들이기에. 이공계 전사(戰士)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수출산업을 주도한 역군들 아니겠는가. 요령도 잔꾀도 통하지 않는 무대에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성과를 올려야 했던 그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오히려 종교인인 나 자신이 순수한 물로 세안한 느낌을 얻었다.
이 은혜로운 만남은 연초 모교 동문회에서 느꼈던 감회를 상기시켜 주었다. 해마다 1월은 영적 칩거를 위해 외부 일정을 잡지 않는다. 그런데 동문회장으로부터 ‘한 말씀’ 요청이 집요하게 들어왔다. “대선배로부터 꼭 모시라는 엄명을 받았다. 못 모시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으름장이었다. 계속 사양했다간 엉뚱한 사람 잡겠다 싶어 응했다. 이 모임에서 대한민국의 경제도약을 이끈 정·재계의 거물들을 얼른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이 80을 훌쩍 넘긴 대선배들의 눈에선 여전히 수재 소년의 총기가 빛나고 있었다. 1등 애국자! 그들 앞에 섰을 때 내 뇌리를 스쳐갔던 단상이었다. 시대의 영웅들에게 드렸던 ‘한 말씀’은 한마디로 재롱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정작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고마움을 잊고 있었다. 오늘의 번영이 있기까지 무역의 전쟁터에서 전사를 방불케 하는 사명감으로 뛰어온 산업역군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세대의 눈물겨운 헌신엔 대한 기억이 오늘의 풍요 속에서 매몰되고 있다. 왠지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현실이다.
그건 그렇고, 다시 그 반가운 날의 얘기를 마저 해보자. 그날 친구들이 내게 전한 감사패에는 쑥스러운 격려가 실려 있었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꿈을 품었던 시절, 태릉캠퍼스에서 동문수학하던 우리들 중에 조금은 다른 길로 가서 보다 더 넓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학우가 있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그 학우는 세상 속의 사람들, 사는 것의 외로움과 고단함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등대처럼 우뚝 선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우리들에게도 큰 보람이요 긍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 모두의 뜻을 모으고 정성을 담아 이 감사패를 드립니다.”
며칠 후 회장이 동기들에게 보낸 메일에 그날의 대화록이 소상하게 중계되었다.
“… 몇몇 동기를 빼고는 모두 차 신부를 졸업하고 처음 만난 것이니까 그야말로 30년이 넘었죠. 반가움 속에 이름과 얼굴을 서로 확인했습니다. 이어진 식사 시간에 앞서 감사패와 디지털 앨범을 증정했습니다. 차 신부가 동기들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식사를 하면서 시종일관 ‘희망, 희망 만들기’를 이야기했습니다….”
4시간에 걸친 달콤한 수다 기록에 덧붙은 한 친구의 시상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있다.
“봄 구경은 언제가 좋을까. 활짝 핀 봄꽃을 보는 것보다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을 봄이 더 좋지 않은가. 희망은 이처럼 새 힘을 솟게 하는가 보다.”
차동엽 가톨릭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 『무지개 원리』 『뿌리 깊은 희망』 등의 저서를 통해 희망의 가치와 의미를 전파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