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빗나간 왕시의 결정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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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2국
[제15보 (183~193)]
黑 . 왕시 5단 白 . 이세돌 9단

전보의 마지막 수인 백△는 초조감의 산물이었다. 승부가 돌연 반집 승부로 변하자 이세돌 9단은 단 한집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겼고 그것이 백△의 무리수로 나타난 것이다.

왕시(王檄) 5단은 초읽기 속에서도 백△가 허점을 지닌 수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어떻게 응징해야 하는지 그 정확한 수순은 모른다. 그러나 승부사의 본능으로 백△가 무리수임을 직감한 것이다.

왕시는 183으로 젖히고 185로 끊어갔다. 수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185는 보태주는 수다. 미세한 형세에서 결정적인 패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왕시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마지막 승부를 이 한 수에 건 것이다.

186으로 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수를 둘 때 이세돌 9단의 가슴은 이미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수 읽기가 빠르기로 유명한 이세돌의 눈엔 백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외길 수순이 한눈에 보였다. 그는 외통수로 걸려들었구나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왕시가 187로 수순을 바꾼 것이다. 이 수는 '참고도' 흑 1을 선수한 다음 3에 두는 것이 정확한 수순. 이것으로 흑은 백을 선수로 차단할 수 있다(실전은 193까지 후수).

흑은 선수든 후수든 어차피 잡힌다. 그러나 선수를 잡아 '참고도' 9의 자리에 뻗는 식으로 집을 늘리며 뒤를 조여간다면 흑 필승의 국면이 된다.

왕시는 선수든 후수든 끊을 수만 있다면 이긴다고 속단했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188자리에 두는 쉬운 수를 놓치고 187에 두어 후수를 자초한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결승전만 되면 마치 귀신의 장난처럼 한국엔 운이 따른다. 이번에도 어떤 귀신이 왕림한 것일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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