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살아보니…

중앙일보

입력

외국에서 12년쯤 살다보면 어느새 그 나라 문화가 몸에 베는 것이 보통이다.

가령, 이제는 신발을 신고 집안에 들어갈 생각은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보다 더 야만적인 매너가 있을까? 또 젓가락대신 포크로 밥을 먹으면 어색한 기분이 든다. 자신을 낮추는 일본식 매너에도 익숙해 져, 가끔 낯선 사람들이 도와주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 "미안합니다"라고 대꾸하게 된다.

일본을 떠난 지 몇 개월밖에 안 되었지만, 이젠 나에게 일본적인 것이라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이다. 자신들의 문화에 침입해 짜증나게 하는 외국인들을 일본화시키지 않고,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친절로 대해 너무 성가시게 굴지 않도록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인들이다.

일본인들은 특유의 공손한 태도와 겸손한 미소를 무기로 외국인들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손함이 철저하게 우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면, 일본을 아주 예의바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공손함이 그 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이 정말로 편안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면, 친절한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외국인들은 거리를 거닐며 일본적인 것을 구경하고, 만지고, 쥐어보기도 하지만, 결코 그 진정한 의미를 몸소 파악할 수는 없다.

더럽고 균이 우글거리는 자신들의 약점이 외국인들에게 직접 드러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지 모른다. 따라서 외국인과 마주치면 마음의 담을 쌓아버린다.

이곳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은 외국인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외국인과는 오랫동안 어울리지 않는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지낸다는 건 마치 "외국인과 만난 일본인"라는 제목의 가부끼(일본의 전통연극)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일본 체류하는 기간동안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택시운전사는 외국인들이 "곤니찌와(안녕하세요)"라는 간단한 일본어를 하기만 해도 갖은 칭찬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이제는 외국인은 일본식당이나 중국식당에 가본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는 일은 드물어 졌다.

그러나 외국인에 대한 어리석은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세기동안 외국인과 자연스런 관계를 맺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불안함과 오만함 때문이다.

전 세계가 아니라면, 최소한 아시아만이라도 일본 천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 일본인 특유의 새침함과 정중함이라는 민족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상당히 서구화 된 일본이지만, 그 황당무계한 자부심은 여전하다.

일본에서 인상적인 사람들을 상당수 만났는데,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해외 여행도 많이 하고, 외국인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일본과 "일본다움" 위주로 돌아간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는 경우는 드물어 졌다.

이제 외국인과 거리를 두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일본인도 많아졌지만, 20세기 초반 일본이 아시아 여러 국가에 저지른 만행을 미화시킨 만화책을 보는 것 또한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제대로 된 자부심을 형성할 수 있는지 무척 의심스럽다.

올해 서울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본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국 역시 외국인에게 친절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여기 오기 전, 지하철 안에서 한 외국 남성이 옆에 있던 여성의 둔부를 만져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여자가 그의 아내였는데도 말이다. 내 경우 아직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물론, 지하철에서 손을 조심하기는 한다.

한국은 지금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아마도 1997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전례 없이 시장 개방을 한 덕분인 것 같다. 한국사람들과 만나면 일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정직함과 솔직함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한국인들 역시 자신들의 치부가 외국인들에게 드러나기를 원치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인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는 적어도 가식적이라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어쩌면 이곳에 머문 시간이 짧아 한국인들이 외국인에게 어떤 식으로 거리를 두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아마 12년쯤은 지내봐야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Donald Macintyre (Time) / 안선주 (JOINS)

◇ 원문보기 / 이 페이지와 관련한 문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