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으로 그림 배워 대통령 초상화 도맡은 이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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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 화백이 그린 전두환·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 초상화(왼쪽부터). [중앙포토]

25일 오전 서울 홍제동 한 아파트 단지 내 상가, ‘정형모 미술 아카데미’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초상화가 정형모(77)씨는 이젤 앞에서 이제 막 박근혜 대통령 초상화의 스케치를 마친 참이었다.

“그냥 선거 포스터에 나온 사진 보고 그리는 중이에요.” 화실 안엔 미소짓는 육영수 여사, 창밖을 내다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뒷모습,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김수환 추기경 등의 초상화가 가득 걸려 있었다. 요즘엔 생경한 사실적 인물화들, 작은 초상화 박물관이었다.

 지난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세종실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공개했다. 정 화백의 그림이었다. 대통령 퇴임 때 초상화를 그려 거는 것이 청와대의 관례.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 등 세종실의 초상화 열 점 중 세 점을 그가 그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때 나온 영정도 그의 그림이다. SK 최종현, 한진 조중훈, 삼성 이병철 전 회장 등 기업인들, 지미 카터·조지 부시(아버지)·빌 클린턴 등 미국의 전 대통령들도 그의 화폭에 담겼다.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고야 같은 궁중화가를 꿈꿨던 수원의 나무꾼 소년은 청와대에 걸리는 대통령 초상화가가 됐다. 정형모 화백이 서울 홍제동 화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초상화 앞에 앉아 있다. 오른쪽은 박근혜 대통령 초상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이명박 전 대통령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리기가 어땠나.

 “보통은 임기 말 1년 전부터들 준비하는데, 이번엔 가을에 의뢰받아 좀 촉박했다. 두 번쯤 뵜고, 여러 장의 사진 자료를 참고했다.”

 - ‘이렇게 그려달라’ 하는 요청사항이 많았나.

 “(미소지으며) 그런 주문들이 있다. 하지만 해달라는 대로만 하면 그림이 안 되지. 이 양반은 (광대뼈 가리키며) 여기가 나왔으니 좀 부드럽게 해 달라든가 하는. 초상화는 어렵다. 그려놓고 좋은 얘기 듣기도 어렵다. 인물의 한 순간을 포착해 내면과 그가 추구하는 바를 표현하면서도 제3자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하고, 내 마음에도 들어야 하니.”

 시작은 이랬다. 강릉 태생의 소년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이 돼서야 아버지와 새엄마가 살고 있는 수원으로 보내졌다. 수원 북부 이목동에서 파장초등학교, 인창중고교를 다녔다. 형편이 어려워 나무를 해다 새벽장에 팔았고, 신문배달도 했다. 그림을 곧잘 그린 그는 세계미술전집을 넘기며 벨라스케스·고야와 같은 궁중화가가 되길 꿈꿨다. 상경해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 미술품 코너에 걸린 초상화를 봤다. 사정사정해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1950년대 말 일이다. 3년 뒤 인근에 화실을 차렸다. 학력이고 약력이고 내세울 게 없었지만, 그림만 믿고 더러 제자들이 들었고 주문이 들어왔다.

지게 지고 다니던 수원의 나무꾼 소년은 그렇게 해서 이젤 지고 5남매를 길렀다. 차녀 진미(50)씨는 "쌀을 봉지 단위로 사다 먹었다. 점심을 거른 적도 많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생이 많으셨다”고 말했다.

넉넉지 않은 생활의 주름살이 펴진 것은 1974년 8·15 저격으로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뒤, 그의 초상화를 그려 청와대에 선물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를 불러 육 여사의 1주기 초상화를 의뢰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다. 퇴임 때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면.

 “더 잘 그려야지. 5년간 대통령의 모습도 많이 변하시겠죠. 70년대 퍼스트 레이디 시절 누군가가 선물한다고 부탁해 그려본 적이 있다. 당시 청와대 다이어리에 그 그림이 실렸었다.”

 화폭에 담은 사람 대부분 이젠 세상에 없다. 인생이 무상하진 않을까. 그도 곧 여든을 바라본다. “오전 6시에 일어나 5시간쯤 그리고, 오후엔 운동하고, 저녁엔 친구들과 대포 한 잔 하는 게 낙이에요. 그림 그리기도 여전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초상화를 그리고는 얼마나 받았을까. 그는 “더도 덜도 안 받았다”며 손사래를 쳤다.

글=권근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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