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부패 개혁 좌절되자 사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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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어 누가 새 교황이 되든 개혁에 적대적이고 기득권에 얽매인 이탈리아 수구파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17일자(현지시간)에서 보도했다.

 WP는 ‘신앙의 붕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에서 로마 교황청이 부패와 권력 남용, 정실인사 등으로 얼룩져 있다고 비판했다. 베네딕토 16세가 600년 만에 자진 사임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것도 개혁 반대파에 밀려 자체 개혁에 실패한 게 원인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 예로 든 게 2011년 여름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를 미국 워싱턴 주재 교황청 대사로 전보 발령한 사건이다. 비가노 대주교는 개혁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당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청 내부의 방만한 재정을 개혁하라는 임무를 비가노 대주교에게 부여했다. 비가노는 성베드로 광장에 매년 설치하는 성탄 장면 모형 제작 예산을 2009년 55만 유로(7억9000만원)에서 2010년 30만 유로로 대폭 줄였다. 업자와 결탁해 예산을 부풀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비가노의 재정 개혁은 교황청 내 반개혁 세력에 의해 벽에 부닥쳤다. 비가노는 교황청의 실세인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장관과 베네딕토 16세에게 개혁을 도와달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비가노의 요청은 외면됐고, 오히려 교황은 반개혁 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비가노를 워싱턴 주재 교황청 대사로 사실상 내쫓았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황의 오랜 집사였던 파올로 가브리엘레는 지난해 이탈리아의 탐사전문 기자인 지안루이기 누치에게 비가노와 교황이 교황청의 개혁과 관련해 주고받은 비밀 편지를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가브리엘레는 바티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교황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직전 가브리엘레를 사면했고, 그로부터 두 달도 못 돼 자신 사임을 발표했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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