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부리 박사' 딸 인형극 부활 꿈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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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형.줄인형.막대인형.몸인형…. 인간이 숨을 불어 넣어, 그나마도 줄.막대기에 의지해 사는 형편이지만 이들도 한때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 1970~80년대 어린이들은 인형극을 보기 위해 TV 앞에 모여들었다.'부리부리 박사''짱구 박사'는 요즘 드라마 못지 않은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들어 자극적인 영상이 브라운관을 뒤덮을 때도 인형극은 고군분투했다. '아라비안나이트''왕자와 거지' 등 명작을 극화해 고정 팬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난 몇년 새 인형극은 TV에서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어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인형극의 부활을 꿈꾸며 팔을 걷어붙인 젊은이가 있다. 서울 정동극장에서 '브루노의 그림 일기'를 선보이고 있는 조윤진(27)씨다.

안녕하세요. 제가 누구냐구요? 크크크. 저는 윤진이 누나가 만든 인형 브루노예요. 뜨개질을 좋아하고 비오는 날 클래식을 즐겨 듣는 개죠. 저는 두달 전에 태어났어요. 윤진이 누나가 첫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며 고심고심 끝에 만들었답니다. 아, 크랙이라는 쥐도 있네요. 요즘 공연 중인 '브루노의 그림일기'는 이 생쥐 녀석과의 한판 대결이랍니다.

크랙은 얼마 전 우리 옆집에 이사왔는데 제가 키운 꽃을 꺾어버리고 자동차를 펑크냈어요. 가끔 크랙을 만든 윤진이 누나가 미울 때도 있지만 금세 맘을 고쳐먹어요. 윤진이 누나가 인형극 안하겠다고 달아나면 어떡해요?

윤진이 누난 어렸을 때부터 인형들 속에 파묻혀 살았대요. 아버지.어머니가 40년 넘게 인형극을 해온 터라 어렸을 때에도 엑스트라 연기 정도는 척척 해냈대요. 참, 누나의 아버지 조용석씨는 '부리부리 박사' 등을 만드신 한국 인형극의 산증인이세요.

누나는 미대에 들어갔는데 영 적성이 맞지 않았나보죠. 3년 전인가 아버지 밑으로 들어왔어요. 아버지에게 "영화.애니메이션.뮤직비디오 등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인형극은 느리고 답답하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인형극은 가지고 있다.

인간미와 따뜻함, 그리고 비전이다"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대요. 누나 말로는 인형극이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래요.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인간미 있는 걸 찾게 된다나요.

'브루노의 그림일기'가 그저 그런 인형극이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쳐요. 이 인형극은 세계에서 가장 유일하고 독특한 작품이랍니다. 누나는 가로 7칸, 세로 5칸으로 짜여진 35개짜리 틀을 개발했어요. 비가 오고 자동차가 달려가는 장면을 이 틀속의 그림들이 도미노처럼 "촤라라락" 넘어가며 보여줘요.

공연 첫날 누나가 너무 긴장해선지 약간의 실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씩씩해요. "처음 시도한 건데 이 정도면 잘한거지"라고 말했어요. 앞으로 전용 인형극장을 짓고 이 작품을 상시 공연하는 게 누나의 꿈이랍니다.

어른이 창피하게 인형극을 보냐구요? 오 노! 인형극은 절대 애들만 보는 게 아니예요. 누나 얘기 좀 들어보실래요? "요즘 어린이들은 어른보다도 유치한 걸 싫어해요. 그런 아이들에게 예쁜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는 무의미하죠. 그래서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인형극을 생각했어요." 맞아요, 누나는 꿈과 희망을 주는 인형극보다 휴식과 재미를 주는 인형극이 더 좋다고 하네요. 30일까지. 02-751-1500.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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