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박사 분석] 상. 박사들 실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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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학박사 김진수(가명.40)씨는 얼마 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았다. 4년째 임시연구원으로 떠돌다 보니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다 우울증을 앓게 됐다. 요즘 그는 친구나 후배를 만나는 것도 꺼린다. "마흔이 됐는데도 주도적인 연구는커녕 보조원 신세로 사는 현실이 서글퍼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대보건소 박수경 전임의는 "김씨처럼 비정규직으로 실험실에 갇혀 지내는 40대 연구원들이 우울증과 강박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했다. 지난 22일 오전 한 지방대학 강의실. 새내기 티를 벗지 못한 1학년생 6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시간강사가 강의를 하고 있었다. "화법의 원칙은 서로 '윈-윈'하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합니다." '현대인과 화법'이라는 제목의 이 강좌를 맡은 강사는 서울대 문학박사 출신인 A씨. 전공과 거리가 먼 교양분야 두 강좌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시간강사 자리도 순수문학이 아닌 단순 어학강좌나 취업에 유리한 기초강좌만 나는 편"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서울대 18개 대학원에서 연간 800여 명의 박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상당수는 갈 곳이 마땅치 않다. 특히 시간강사나 임시직 연구원 등 '잠재적'실업 상태인 인문.사회.자연대 등 순수학문 박사들은 생활고에 쫓겨 지속적인 연구가 불가능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2001~2004년 서울대 박사 출신 시간강사의 평균 나이는 39세. 대부분이 두세 명의 식구를 거느린 가장이다.

교내 강사 대기실에서 만난 문학박사 이모(39)씨는 "서울대에서 맡고 있는 교양 한 강좌와 번역 정도가 전공 관련 활동"이라며 "빠듯하게 생계를 잇는 현실에서 논문은 엄두가 안 나 못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실에 있던 다른 시간강사 역시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마쳐야 할 번역 분량이 먼저 떠오른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때문에 맞벌이를 해 '와이프 스칼러십(장학금)'을 받거나, 부모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캥거루'박사들이 그나마 연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자조(自嘲)도 나온다. 후배 박사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기에 시간강사 자리도 보장되지 않는다.

평균 2~3곳의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시간강사의 수입은 월 70만~110만원 선. 인문대 최모(39)씨는 "방학 때는 시간강사 자리도 끊겨 학기 초부터 보습학원 같은 데에 미리 강사 예약을 해놓아야 한다"면서 "일감이 많은 경영학.처세술 관련 책을 번역하는 문학박사들도 적잖다"고 말했다.

이공계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학박사 박모(33)씨는 "오전 9시30분에 출근해 밤 12시까지 실험실을 지키는 생활도 힘들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지치게 한다"고 말했다. 박씨의 월수입은 120만원. 박씨는 "얼마를 버느냐에 앞서 불혹을 넘긴 선배들 대다수가 임시직이라는 현실이 더 암울하게 한다"고 덧붙였다.

"왜 한국에 남아 박사를 했는지, 지금은 후회뿐이다. 동료들처럼 젊었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으면 지금 이런 신세는 아닐 텐데…." 교수 임용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이학박사 B씨는 "이제는 학문의 꿈을 접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탐사기획팀 = 양영유.정용환.민동기 기자
김상진.노은미.박재명.이민영 인턴기자
제보 =, 02-751-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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