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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가방은 누가 만든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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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논설위원

그는 가죽을 좋아했다. 서너 살 때부터 가죽 냄새를 맡고 자란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에겐 서울 종로5가의 큰아버지 양화점이 놀이터였다.

 16살. 고등학교를 갈 나이에 그는 양화점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가족들은 “고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만류했다.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강했다. 하지만 “평생 가죽을 만지면서 살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구두부터 만들길 7년이었다. 큰아버지가 “일본에서 배워오라”며 일본인 친구를 소개했다. 도쿄의 아사쿠사에 있는 가죽공방이었다. 나름 솜씨가 좋다고 자부했던 그였지만 말을 못 알아들어서, 일하는 문화가 달라서 엉뚱한 물건을 내놓기 일쑤였다. 그래도 2, 3년 고생하니 본디 실력이 나왔다. 어느덧 일본에 경제위기가 왔고 외국인인 그부터 잘렸다. 일본인 사장은 대신 “자네는 기술도 좋고 능력도 있으니 한국에 돌아가 하청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이었다.

 9년 만에 귀국한 그는 서울 방배시장 상가건물 2층에 조그만 공방을 차렸다. 지인과 단 두 명이 벌인 일이었다. 한두 개로 시작한 주문은 네댓 개로, 열 개로 늘어갔다. 외환위기가 그에겐 ‘외환대박’이었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달기 시작했다. 일개미란 뜻의 스페인어를 골랐다. “죽을 때까지 일 열심히 하자”는 각오에서였다. 내수에도 도전했고 곧 유명백화점에도 들어갔다.

 그 사이 두 명이 뚝딱대던 곳이 50여 명이 북적대는 일터로 바뀌었다. 50만~60만원 하던 가방이 100만~1000만원대가 됐다. 30여 년 ‘가죽 인생’이 일궈낸 변화였다. 중졸 출신 장인이, 고가의 가방을 만드는 어엿한 중소기업 대표가 된 것이다.

 정윤호(52) 휘권양행 사장의 얘기다.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면 최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들고 다닌다고 잘못 알려졌던 가방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의 브랜드 가방이었다. 일부 인사들이 인터넷에서 “대통령이 고가 가방을 들어서야 되겠느냐”고 주장해 논란이 됐었다. 국가 지도자는 중·저가만 써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의 발로였다.

 실망스러운 건 당선인 측의 대처였다. 조윤선 대변인은 “(당선인의 가방은) 영세업을 하는 분이 작은 가게에서 만드는 것이다. 알려진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제품”이라고 해명했다. 고가의 가방을 들면 잘못이란 주장을 수용하는 투였다. 정 사장 측이 당선인을 이용해 마케팅을 한 게 아니냐며 불쾌해하는 기류도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박 당선인은 10여 년간 매년 1억원 안팎을 받는 고액 연봉자였다. 앞으로 5년간 2억 가까운 연봉도 보장됐다. 그가 100만원대 가방을 든다? 과소비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불황기다. 있는 사람이 돈을 쓰지 않으면 누군가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박 당선인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근검절약을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내수 살리기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논란이 된 브랜드는 우리나라 사람이 디자인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한 땀 한 땀 꿰어 만든 거다. 조그만 공방이 중소기업으로, 남의 상표를 달던 게 ‘국내 명품’으로 성장한 경우다. 당선인 측에 ‘중소기업=중·저가’란 인식이 있는 게 아니라면 불쾌해하기보단 대견해했어야 할 대상인 게다.

 당선인 측이 정작 사용 가방에 대해선 ‘작은 가게에서 만든 것’이라고만 한 것도 아쉽다. 이름을, 브랜드를 밝혔어야 했다. 소상공인, 중소기업을 돕는 길이 금융지원·정책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사용한다는 걸 알리는 게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일 수 있다. 미셸 오바마처럼 말이다. 박 당선인이 들고 다녔다고 오인된 가방도 잘 팔린다고 하지 않는가. 패션에서도 비밀주의는 곤란하다.

 다시 정 사장의 얘기다. “(대통령이) 국내 브랜드들을 들어 주는 것, 그게 그 사업을 살리는 거예요.” 게다가 알리기까지 한다면. 그만의 바람은 아닐 게다.

고 정 애 논설위원